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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강화 선원사지(사적 제 259호)

by 형과니 2023. 3. 29.

강화 선원사지(사적 제 259)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3 09:35:47

 

인천문화유산 답사기 l 강화 선원사지(사적 제 259)

 

팔만대장경의 '탯줄' 묻혀있는 절 터

 

팔만대장경의 고향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로 향했다. 선원면사무소가 자리잡고 있는 마을에서 더러미 돈대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낮은 능선이 보이고 그 앞에 넓은 터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팔만대장경이 태어난 곳이다. 농가를 개조한 듯한 가건물에 걸린 울긋불긋한 연등을 보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대장경의 본산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말하는 고려대장경은 선원사라는 절에서 판각됐다고 추정한다. 선원사는 고려시절 몽고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시절에 최고권력자였던 최우가 고종 23(1236)에 총화단결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세운 국찰격 사찰이다.

 

금부처 500여기가 봉안되고 고종이 이 절에 행차한 기록이 있을 만큼 당시에는 순천의 송광사와 함께 고려 2대 사찰로 꼽힐 만큼 규모도 거대했다고 한다. 고려 고종은 강도(江都)에 피난 온 50만 명의 마음을 한데 모으기 위해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이 곳에서 속대장경의 대역사를 시작한다.

 

선원사가 대장경을 만들기에 적합했던 것은 인근에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는데 옛날에는 그곳이 바다였기 때문에 거제도에서 대장경에 쓰일 관목을 싣고 절 앞까지 배가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해결하려는 불심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16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 고종 38(1251)8만장에 이르는 대장경을 완성한다.

 

그 후 이곳에 147년 동안 보관됐다가 조선 태조7(1398)2천여 명에 이르는 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양에 있는 지천사에 일단 옮겨졌다가 다시 합천 해인사로 향했다. 고려가 개성으로 환도한 후 선원사는 역사 속에 묻혀지고 폐허로 남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 승려로서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던 신돈이 이곳에 머물다 처형당하기 직전에 선원사의 각종 유물을 우물 속에 넣고 죽었으며 공민왕은 절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그 때 타다 만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경내에는 그동안 절 터에서 발굴한 암막새기와, 평기와, 청자대첩을 비롯해 대장경판 등 3백여점의 유물을 전시한 반지하 방의 형태로 만들어진 44평의 유물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뒤쪽으로 오르면 고려대장경의 '탯줄'이 묻힌 선원사지가 펼쳐진다.

 

11.5의 넓은 절터는 수술 중인 환자의 복부처럼 이곳 저곳 갈라져 있다. 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3차까지 발굴이 진행된 선원사지는 발굴횟수가 늘어날수록 750년의 세월 동안 고이 간직한 팔만대장경의 신비를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

 

글 유동현

사진/카툰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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