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의 상여가 지나간 경서동 섬피둑길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2 12:17:33
대제학의 상여가 지나간 경서동 섬피둑길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마을의 좌수가 급히 신발을 꿰면서 달려 나가자 부평 관아의 이방이 말했다.
“한양에서 대제학 류사눌 나리의 조카이신 공조참의 나리께서 오셨소.”
“아이구, 못 알아 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좌수는 허겁지겁 그 자리에 엎드렸다. 참의는 부평 부사보다도 두 직급이 높다. 건을 쓴 공조참의가 엄숙하게 말했다.
“내 당숙부이신 대제학께서 오늘 새벽 숙환으로 돌아가셨네. 그대가 아는지 몰라도 당숙께서는 생전에 이곳을 다녀가신 적이 있고 이곳을 묏자리로 결정하셨느니.”
좌수가 답했다.
“오래 전에 존귀하신 대제학 류사눌 나리께서 오셨지요. 그리고 그 뒤 그 존귀하신 류씨 집안에서 젊은 분이 지관과 함께 나오셔서 범머리산을 돌아보고 가신 게 기억납니다.”
이방이 입을 열었다.
“좌수, 대제학 나리가 여기 묻히신다는 건 마을의 영광이 아니오? 이 마을 백성들에게 일을 시켜야겠소. 병자나 노인만 빼고 남녀 모두 나서서 일하라고 부사 나리도 말씀하셨소.”
그때부터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한양에서 다시 십여 명이 와서 좌수네 집과 옆집에 묵고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침식을 시중들면서 부역에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양에서 온 공조참의가 산으로 올라가는 작은 둑을 가리켰다. 그곳은 갈대가 우거진 습지였다. 개개비새들이 무슨 일인가 놀라 야단스럽게 울었다.
“여긴 상여가 갈 수 없지 않은가?”
참의의 말에 좌수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길을 만들어야지.”
“거리가 삼백 보는 되옵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에 어떻게 길을 만들지…….”
참의는 헛기침을 했다.
“좌수가 애를 써 줘야지 어찌하겠나? 백성들의 노고는 모른 척하지 않을 테니 애를 써 주게.”
마을 사람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매달렸다. 수렁이나 다름없는 갈대밭에 높이가 어른 키 반길이 되고 너비가 열 자가 되는 길을 수백 보나 만들려니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열 살이 못된 아이들까지 들것을 만들어 흙을 날랐는데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그때 마을 소년 하나가 제안했다.
“섬피에 흙을 담아 쌓으면 어떨까요?”
섬피란 곡식을 담는 짚으로 만든 자루를 말했다.
“그게 좋겠군.”
사람들은 나뉘어졌다. 한 쪽에서는 짚으로 엮어 흙을 담아 나르기에 적당한 크기의 섬피를 만들고, 한 쪽에서는 그것에 마른흙을 퍼 담고, 힘이 좋은 장정들이 그것을 줄을 지어 등에 지고 날랐다. 그것을 다섯 층 깔아 놓은 뒤에 평탄하게 흙을 깔면 될 것이었다.
예고 없이 닥친 일, 그리고 장례 날 상여가 오기 전에 끝내야 할일이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켜고 정신없이 뛰었다. 몸이 약한 사람들이나 아녀자들은 지쳐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울력을 한 끝에 마침내 둑길이 장례 날 아침 번듯하게 완성되었다.
한낮이 되자 화려하면서도 장엄하게 꾸며진 상여가 도착했다. 따라온 사람도 수백 명이었다. 장례가 끝난 뒤 류씨 가문과 조정에서 마을 백성들을 위로하여 쌀 백 섬을 보내 왔다. 단순하고 착한 것이 백성들이라 그들은 기뻐하며 그때의 고단한 울력을 잊었다. 이 길은 그때부터 섬피둑길로 불려졌다. 얼마나 탄탄하게 만들었는지 5백년이 넘도록 훌륭한 농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천 최초의 골프장인 국제컨트리클럽의 진입로로 사용되고 있다.
류사눌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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