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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극작가, 함세덕

by 형과니 2023. 4. 1.

극작가, 함세덕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1 00:45:56

 

[인천인물 100] 극작가, 함세덕

 

굴절된 현대사에 억눌려 천재성이 증발된 극작가 함세덕. 친일의 오점과 월북작가로 낙인 찍혀 남한에서 그의 작품이 금기시됐다. 그의 처절한 삶은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한장의 흑백사진에 압축한 것처럼 가슴 찡하기만 하다. 연극에 대한 치열한 열정과 천재적인 재능이 현실의 벽에 가로 막혀 이름 석자 제대로 활보하지 못했던 암울했던 우리 역사를 탓해야 할까.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수로 꼽히는 그의 작품에는 인천이 오롯이 녹아 있다. 고향 인천의 머릿속 잔상은 그의 훌륭한 작품 모티프였다. 그래서 항도 인천인들에게 그와 그의 작품은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인천에선 그의 재능을 심정적으로만 인정할 뿐 구체적인 기념사업 하나 제대로 이뤄진게 없다. 그를 아끼는 지역 문인들이 추모비를 만들자는 미세한 움직임은 있었으나 불발에 그쳐 진척되지 않고 있는 상태.

 

그러나 학자들은 함세덕의 평가와 관련, 빠른 시일내 그의 친일 행적을 공개적으로 청산하고 뛰어난 작품에 천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제는 친일과 월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예술성에 접근하는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세출의 극작가 함세덕의 본적은 '경기도 인천부 화평리 455번지'로 돼 있다. 그의 조부 함선지는 정3품 벼슬을 지냈으나 대원군때 낙향해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또 부친 함근욱은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일본어학교'를 졸업한뒤 전남 나주군청 주사로 발령받는다. 그해 1915523일 함세덕이 태어 났고 부친을 따라 목포로 이주한다. 그는 목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인천공립보통학교(현재 창영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고 부친도 객주를 시작한다. 1929년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한뒤 금강산이나 인천앞바다 섬 여행을 통해 문학적 소양을 쌓는다. 특히 학창시절부터 연극에 심취했던 그는 영화와 악극, 연극을 공연하던 용리의 '애관'을 자주 드나들며 문학적 갈증을 해소했다고 그의 동창생들이 증언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연극판에 입문한 것은 1936년 희곡 '산허구리'를 조선문학에 발표하면서부터. 이 작품은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Jhon Millington Synge)'바다로 가는 기사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인천 인근의 섬과 주민들의 생활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초기 대표작인 '동승'1939년 동아일보사의 제2회 연극대회 참가작으로 상연됐다. 동승은 지난 2003년 주경중 감독이 같은 제목으로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했고 상하이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시카고영화제 관객상을 받는 등 뛰어난 작품성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초기 작품은 리얼리즘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해연'의 당선은 유치진과 교류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가장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시기는 일제의 광기가 극에 달한 1940부터 1944년까지다. 작품활동의 황금기를 맞은 그에게 가장 극렬한 친일 연극판이 자리잡았던 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1940년 발표한 '낙화암'은 백제 패망이라는 민족적 감정을 담고 있지만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친일의 소지가 발견된다. 이후 발표한 '에밀레종''추장 이사벨라', '거리는 쾌청한 가을날씨' 등의 창작 희곡은 그의 친일 행적이 더욱 노골화한다. '에밀레종'은 신라와 일본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선전하고 나라의 종을 완성하기 위해 아이의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깔고 있다. '추장 이사벨라''거리의 쾌청한 가을 날씨' 역시 일본을 미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이와 관련해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만수 교수는 당시 한막 이상 일본어를 사용한다든 가 국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주제만 연극공연이 가능한 일제의 통제정책을 감안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1942년 일본 동경의 극단 '전진좌'에 연구생으로 유학하면서 그의 친일 색깔이 더욱 짙어 진다.

 

그러던 그가 해방 이후엔 돌연 좌익에 몸을 담근다. 이해가 어려운 사상의 널뛰기다. 그는 조선연극동맹에 가입해 운명을 같이하고 '인민민주주의 민족전선'의 노선으로 활동을 벌이다 1947년 월북한다. 이시기 그의 좌익 작품은 친일행위에 대한 보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미년 31'이라는 작품은 청년 학생들이 민족대표 33인의 부르주아적 허위성을 깨닫고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계급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1947년 미군정청의 마녀사냥식 좌익 색출에 쫓겨 친구들과 월북한 그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산사람들'과 이승만대통령을 타도대상으로 삼은 '대통령' 두작품을 쓴다. 그러나 이념적 판단과 더불어 당시 남한에 비해 북한이 훨씬 더 연극 활동을 하기에 좋은 여건이었던 점도 월북의 상황논리로 충분히 가정할 수 있다. 연극에 대한 그의 불같은 열정때문이다. 이는 6년전 동생 성덕(작고)씨의 항변에서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운명을 달리한 동생 성덕씨는 형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라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열정이 뜨거웠다고 한다. 그는 특히 형의 작품을 공연하는 연극단원들과 연구 학자들을 도와 주는 등 애틋한 형제애를 보였던 것으로 주변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1950629일 함세덕은 북한 인민군 선무반 제2진으로 남하하다가 서울 신촌 부근에서 수류탄 오발로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데올로기의 그늘에 가려 그에 대한 평가는 저질의 목적극만을 양산했지만 재능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작가 정도로 치부된다. 그러나 지난 1988년 그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작품에 녹아 있는 치열한 시대의식과 연극혼이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친일과 친북으로 얼룩진 그의 작품은 인천에서 부활해야 한다.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연극판이 친북 행적만을 앞세워 함세덕을 매도하는 현실은 이제 작품성으로 걸러져야 한다. 목숨을 담보했던 월북행적 역시 북한으로부터 외면받으면서 함세덕은 남·북 양쪽의 미아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인천의 서정성을 다시 복원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남은 과제다. '반쪽' 함세덕이 아닌, 작품만을 위해 짧은 생을 쏟아 부었던 천재성을 모두 발굴해 내야 한다. 부끄러운 그의 삶을 모두 해부해서라도 말이다.

 

[인터뷰] 김만수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천이 낳은 함세덕은 이제 천재적인 극작가로서 재조명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만수(45)교수는 민족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외투를 벗어 던져야만 함세덕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연극계의 거목처럼 추앙받는 유치진보다 한단계 더 높게 함세덕을 평가한다. 작품에 녹아 있는 그의 천재성이 당시의 열악한 연극계의 토대에서도 가능했다는 점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동생 함성덕(5년전 별세)씨를 인터뷰하면서 김 교수는 함세덕의 친일과 친북 행적의 관점을 이제 청산해야 할때라고 직시했단다.

 

형에게 지극했던 동생 성덕씨는 김 교수가 함세덕에 대한 책을 쓸 당시 친일과 월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증언했다. 김 교수는 함세덕의 친일 행위는 모두 드러내 공개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그러나 이런 과거사 청산을 통해 함세덕의 뛰어난 작품을 재조명하는 사회의 포용력이 절실한 때라고 설명한다.

 

그는 지난 2003년에 펴낸 '현실과 무대 사이에서 표류한 극작가 함세덕' 책에서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 타고난 천재를 다하지 못하고 떠난 함세덕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길 기대한다며 발상의 전환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난 1995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함세덕 연구에 몰두해 박사학위를 받은 그로서는 왜곡된 현실의 족쇄가 채워진 함세덕을 이제 해방시켜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함세덕이 태어난 인천에서 그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해야 한다그의 작품을 친일이나 월북으로 덧씌워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손실이다고 말했다.

 

/ 이희동·dhl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