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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한국최초의 전화

by 형과니 2023. 3. 9.

한국최초의 전화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 것들

 

2007-01-12 12:52:04

 

 

한국최초의 전화

 

한국 통신역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자석식 전화기를 설치한 것은 1896102일의 일이다. 궁중에 11백 회선의 전화교환기를 놓고 망건을 쓴 교환수들이 최초의 수동식 전화기인 덕진풍(텔레폰의 음을 한역함) 설치) 부처 간 전화를 연결했다. 그 후 18981월 한성의 주요 관청에 전화를 가설했고, 다시 19007월에 경성과 인천 간시외전화를 개통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백범 金九 선생은 자서전 백범일지에 한국 최초의 시외전화인 경인 간 전화개통이 이보다 3년여 앞선 1897823일이라고 밝힌다. 백범일지의 기록은 이렇다.

 

사형은 형식적이나 임금의 재가를 받아 집행하는 법이기 때문에 법무대신이 사형수 각인의 공술(供述·진술)을 갖고 조회에 들어가 상감 앞에 놓고 친감(親鑑·임금이 직접 살핌)을 거친다. 그때 입시했던 승지중 한 사람이 각 죄수 공술을 넘길 때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네 글자가 눈에 띄어 이상히 여긴 나머지 재가수속을 마친 안건을 다시 임금에게 올렸다. 대군주는 그것을 읽자 즉시 어전회의를 열고 국제관계니 만큼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고 하면서 전화로 친칙(親)했다고(親) 한다.

 

이상한 일은 그 사이 경성부 내엔 이미 전화가 가설된 지 오래지만 장거리 전화는 인천까지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인천까지의 전화가설공사가 끝난 것은 겨우 33일 전의 일이었다. 병신(丙申)8월 26일이었다.

 

이 기록으로 미뤄 궁내부에 전화를 설치한 1896년부터 한성지역에 시내전화를 가설한 1898년까지 경성-인천지역 주요 관청 간 긴급 연락을 위해 전화를 가설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구선생이 민비를 시해한 일본 육군 중위 쓰지타(土田)를 때려죽이고 인천감옥에 수감, 사형집행을 기다리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시외전화덕이었다. 아울러 이 시외전화가 없었으면 해방전후의 역사도 다시 써야 했을 터이다.

 

그런가 하면 인천시의 사적지 발굴보존대상 자료에는 중구 경동 218의 22 일대 화신양복점 건물을 경인 간 최초 전화개통지로 확인하고 1898128일 인천한성간 최초로 전화선을 가설하고 22년 뒤 시외전화를 개통했다고 기록한다.

 

1902330일 인천전 화소를 설치해 시내전화 업무를 총괄하고 61일에는 인천한성간 자석식 전화 12회선을 설치해 교환업무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한국전기통신 1백년사엔 1903217일에 인천전 화소의 교환업무를 시작했다고 기록함)

 

전화기 도입 및 전화통화에 대한 기록은 또 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문화대관 교통통신편엔 1898128일 오후 3시 인천감리가 외아문에 영국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보고한 사실이 최초의 시외전화 통화기록이라고 소개한다.

 

전화기 도입은 이보다 훨씬 앞선 18823월경으로 청나라에 갔던 상운(尙蕓)이 전화기를 가져와 고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통화를 했는 데, 그해 7월 발생한 임오군란 때 난병들이 파괴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기록의 차이는 있지만, 경인 간 「시외전화」「시외전화」 개통이 국내 전화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후 경인 간 장거리 전화를 시발점으로 대륙침략에 나선 일본은 인천우편국으로 하여금 인천∼서울 간∼ 전화가설을 서두르도록 했다. 그러자 자극을 받은 정부는 일본 측의 전화가설을 막으려고 별 준비 없이 전화가설을 급히 추진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1902318일 통신원령 제1호로 전화개통을 공고했고 20일에는 공중전화의 효시인 민간전화를 개통했다.

 

이어 통신원 산하 전화소 직원들이 외국인 상사집을 찾아 전화가설을 독려하는 등 전화기보급에 나섰으나 민간전화 개통 11년 동안 한성 11, 인천7인천 7곳에 전화를 가설하는 데 그쳤다. 이 중 인천에 본사가 있던 세창양행이 인천과 강원도 금성탄광을 잇는 전화선을 놓아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 처럼 전화회선은 많지 않았지만 전화통화건수는 갈수록 늘었다. 1903년 한 해 동안 통화건수는 무려 8천48천4백여 건에 달했을 정도. 여기에다 일본이 대륙전쟁 및 식민지통지수단으로써 해방 전까지 전국 주요 도시에 전화선을 속속 가설하면서 항만과 인접한 인천 곳곳엔 전주대들이 즐비했다.

 

이 중엔 특이한 전화 관련 기록도 보인다. 1919년 무렵, 호황을 누리던 인천미두취인소(곡물거래소)와 한성 미두장간 전용선을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한국 최초의 직통라인(핫라인)이었던 셈.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장거리 자동전화의 개발을 가속화, 지난 74713일엔 인천_서울 간_서울간 240회선의 DDD 통신망을 갖추게 된다.

 

그럼 초창기 시외전화 요금은 얼마였을 까?? 전화요금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광무 631일 발표한 전화권정규칙(電話權定規則)이다. 이 규칙에 따라 한성과 인천사이의 통화료는 분마다 50전을 받았으며 전화호출업무도 겸해 호출대상자의 집을 거리로 계산해 1리마다 22 전식을 별도로 부과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