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어떤 곳인가 ?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24 16:25:03
인천은 어떤 곳인가 ?
1. 인천 지역
인천은 2천 여년 전 비류가 개국한 땅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기원 18년 경에 비류와 온조 형제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옛 미추홀 지역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번창하지 못하고 비류가 세상을 뜨자 온조가 세운 백제에 통합되어 백제국을 이루었다고 한다. 비류가 당시 개국한 중심지역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동사강목」,「여지도서」,「중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비류성터가 문학산에 있었다고 하니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현 관교동 일대가 옛도읍지라고 보여진다.
#「동사강목」제1장 안정복(1712~1791) :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세속에 전해오기를 문학산 위에 비류성터가 있다. 성안에 비류정(우물)이 있는데 배우 시원하다.
#「여지도서」: 문학산상 정상에 제법 넓고 평평하니 곧 비류왕의 고도(古都)이다. 성터가 남아 있다.
#「중보문헌비고」14권 : 미추홀은 비루가 도읍한 곳이다. 인천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남산이라고 부르고 문학산 이라고 한다. 산상에 성이 있는데 비류왕이 도읍한곳이다.
미추홀이 행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413~491)다. 고구려는 백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475)이곳에 '매소홀현'을 두었다. 백제의 성왕 29년(551) 백제와 신라(진흥왕) 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물리치고 백제가 한강유역 하루에 6군을 점령하였다.
신라는 한강상류 10군을 점령하였다. 553년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깨고 하류지역마저 점령하여 신라영토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에 매소홀현을 소성현이라 바꾸고 율진군(과천)에 속하도록 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현종 9년(1018)에는 수주(부평)에 속하게 되었으나, 숙종때에 이르러 숙종의 어머니 '인예순덕 태후'의 출생지가 바로 소성현인 관계로 경원군으로 승격 되었다. 인종때에 이르러 인종의 어머니 문경태후 또한 이곳이 출생지가 되므로 '인주'가 되었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는 인천이 다시 '경원부'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모두 고려 왕실의 7대 어향이기 때문에 우대 되었다고 한다.
인천을「7대 영향」이라 부르는 것은 문종조에서 인종조에 이르는 동안 인천이 와의 외향이 되거나 왕비의 내향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7대 임금은 순종, 선종, 헌종, 숙종 문종, 예종, 인종이며 이중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의 5대왕은 인주 이씨 왕비의 소생이므로 인천이 왕의 외향이되고 문종, 순종, 선종, 예종, 인종의 5대 왕은 인주 이씨를 왕후로 맞이하고 있으므로 왕비의 내향이 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원년에 (1392) '인주'로 다시 환원되었으나 태종 13년 (1413)의 지 방제도 개편으로 인천군이 되었고, 세조 6년(1460)에 이르러 인천군이 다시 '인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인천이 세조의 어머니 소현왕후 '심'씨(세종비)의 외가가 되었기 때문에 승격되었다고 한다.
영조시대(1725~1776) 인천부는 10개면으로 편성되어 개항 후 1914년 인천부의 행정구역 개 편 때까지 유지되었다.
# 10개면 :부내면(副內面)(현관교동), 조동면(鳥洞面) 신현면(新峴面), 전반면(田反面), 황둥천면(黃等川面), 남촌면(南村面), 원우미면(遠又彌面), 다소면(多所面), 두안면(痘岸面), 이포면(梨浦面)
# 속 도 : 자연도(영종), 삼목도, 용유도, 무리도, 사탄도, 원도, 추갑도, 언타도
고종 20년(1883) 인천이 개항되면서 개항장인 제물포에 감리가 설치되어 인천부사를 겸임 하게 되었다.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지방제도가 개정되면서 조선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을 23부 331군으로 통합하여 관찰사를 두었을 때 인천부가 되면서 감리를 폐지하고 인천부에 부평, 김포, 양천, 시흥, 안산, 과천, 수원, 남양, 강화, 교동, 등 12개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1896년 다시 지방제도 개편으로 13도 1목 9부 329군으로 개편하면서 인천은 9부의 하나로 경기도에 속하여 다시 감리서가 부활되었다. 그 후 광무 10년(1906)에 감리서가 폐지되고 인천 부윤이 감리사무를 보게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 나라 주권이 상실되었고, 1914년에 부, 군, 면을 통합하면서 인천부의 행정구역이 개항장(부내면과 다소면 일부)으로 축소되었고 그 외 지역은 부천군이 생기면서 모두 부천군으로 흡수되었다.
1936년 인천부가 1차로 관할구역을 확장하면서 부천군의 문학면 일부와 다주면 일부를 편입하고 1940년 2차로 관할구역 확장 부내(계산동), 서곶, 문학, 남동 4개 면을 편입시켰다. 1949. 8. 15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천부가 시로 승격되었다.
1963. 1. 1 부천군의 작약도가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1968. 1. 1 인천시는 행정구역을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4개 구로 개편하였다. 1988. 1. 1 남동구, 서구가 새로 신설되었다. 1989. 1. 1 김포 계양면과 옹진군의 영종면과 용유면이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1995. 1. 1 인천광역시로 되면서 김포 검단면, 강화군, 옹진군이 편입되면서 계양구 연수구가 신설되었다.
2. 부평 지역
부평은 옛 삼한시대 진한에 속한 한수 유역 '우휴모탁'부족의 지역이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백제가 강성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으나 고구려 장수왕 58년(470)에 백제를 몰아내고 우휴모탁지역에 '주부토군'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부평의 뿌리가 되었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문무왕 8년(668)에 삼국을 통일하였고,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신라는 전 국토의 옛 지명을 모두 바꾸었는데 이때 주부토군은 '장제군'이 되었다. 장제군은 한주에 속한 군으로 4개의 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 검포현 김포 검단 술성현 대곳
# 동성현 하성 분진현 통진
고려 태조8년(925) 장제군이 호족인 '이희목'이 고려조에 의해 개국의 공이 크다고 벽상공으로 추대되었다. 태조 23년(940) 3월 지방제도가 고쳐지면서 장제군이 수주로 격상되었다. 수주의 유래는 수소마을(현 목상동)의 호족인 '이희목'이 수소마을에 살고있기 때문에 이곳을 '읍'으로 정하게 되어 수주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종 9년(1018) 지방행정기구를 개혁하여 전국을 3경 4도호보 8목 56지주사를 두면서 수주는 56주의 하나로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 황어현(계양) 분진현(통진) 금천현(시흥) 부평현(부천) 수안현(대곳) 안산현(안산) 김포현(김포) 소성현(인천) 부원현(고양) 동성현(하성) 공암현(양천) 서천현(교하)
이렇게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자 수주읍에서 교통이 편리한 배곶이(오류동)로 '읍'을 옮기게 되었다. 문종 23년(1069) 수주는 양광도에 편입되었고, 숙종 10년에는(1105) 소성현이 경원부로 승 격되어 분리되었다. 인종 5년(1127) 왕은 전국 56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치하니 '오리울'에 향교를 세움(부평 향교의 시초) 의종 4년(1150) '수주'가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의종 19년(1165) 안남도호부 청사를 '배곶이'에서 중구봉 아래 '온수골'로 이전하였다. 고종 2년(1215) 안남도호부를 계양도호부로 개칭하게 되었고, 이어 금천현이 분리되고 동성현과 수안현을 통진현에 통합시켜 분리시킴. 고종 6년(1219) '이규보'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부임, 후세에 많은 글을 남김. 충렬왕 34년(1308)에 계양도호부가 '길주'로 승격됨. 충선왕 2년(1310) 부평부로 강등되면서 양천현이 부평에서 분리되고 황어현을 부평부에 편입시킴.공양왕 3년(1392) 부평부는 '경기우도'에 편입됨.
태조 4년(1395) 6월에 경기좌도에 부평과 인천이 편입됨. 태종 13년(1413) 부평부 부평도호부로 승격, 부원현은 고봉현에 그리고 석천현은 서원현에 떨어져 나가고, 인주가 인천군으로 되어 부평부에 속함. 세종 17년(1435) 7월 23일 양천현이 부평으로 편입되었으며 인천, 해풍(개풍), 김포, 동진, 양천, 교동을 관할함. 세종 20년(1438) 부평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어 세종 28년(1446) 11월 1일 다시 '도호 부'로 승격됨. 세종이 부평지역에 있는 온천을 찾도록 명하였으나 온천을 발견못한 죄로 강등됨.
세조 원년(1455) 부평도호부에 중익진을 설치 병자절제사를 부사가 겸임. 이때 병영지를 현 병방동에 둠(세조 3년에 수원으로 이전함). 연산군 11년(1505)에 부평도호부 부평읍으로 강등되었다가 1년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 원년(1506) 9월 다시 도호부로 환원됨. 김순손이란 참판이 중죄를 범한 관계로 그의 고향인 부평도호부를 강등시킴.
고종 32년(1891) 부평부는 인천부에 속한 부평군으로 강등되었다. 고종 33년 건양 원년(1896)에는 경기도에 속함. 1914 부, 군, 면, 폐합 때 부평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부천군이 신설됨(부평군 내면'계산동' 의 부평군 청사를 폐하고 인천읍'관교동' 청사에서 부천군이 개청함). 1940년 제 2차 인천부역 확장으로 옛 부평지역이 대부분 인천부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