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가 강화석·강준 부자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8 11:39:50
[인천인물] 개화기 근대문물 토착화 '신지식인'
계몽가 강화석·강준 부자
가톨릭 신자이자 관인의 신분으로 개항당시 인천지역사회에 깊이 관여하며 종교와 교육, 계몽운동을 활발히 펼친 강화석(세례명 요한). 그리고 그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문한 강준(세례명 바오로) 역시 신앙생활은 물론 교육사업에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갔다.
하지만 강화석이 아들(강준 1910년 이주)을 따라 1917년 황해도 수안지방의 들무정으로 이주를 하게 되면서 인천을 떠나게 된다
특히 관직에 있으면서 근대화된 문물을 받아들여 계몽가로도 활동한 강화석은 당시 보기 드문 신지식인중 한사람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1910년 창간된 뒤 지금까지도 발행되고 있는 한국천주교의 대표잡지 가운데 하나인 경향잡지에는 강화석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해 당시 강화석이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얼마나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들 부자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한 상태로 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 지역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인천학연구원 시절 강화석에 대한 연구를 했던 이희환(도서출판 작가들대표)씨는 “강화석·강준 부자는 당시 인천지역에서 다양한 교육 및 계몽활동을 펼쳤지만 1910년 강준, 1917년 강화석이 황해도로 이주, 그곳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인천지역에서는 이들 부자의 이름을 듣기가 어려워졌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하지만 이들 부자가 인천지역에서 벌였던 다양한 사업들을 계기로 인천지역에서는 이후 학교설립이 이어졌고 계몽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현재 인천지역에서 이들 부자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강준이 설립자로 참여한 인천박문초등학교측에서는 강준에 대한 근거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학교 관계자는 “세월이 너무 오래돼 당시 자료들이 보관돼 있지않고 설립자들에 대한 자료도 제대로 보관돼 있지않아 100년사를 발간하려다 자료부족으로 중단되기도 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강화석은 1845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출생했다. 황해도 지방의 권세있는 반가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강화석은 어려서 사서를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다 1865년 20세의 나이로 가톨릭에 입문한다. 당시 대원군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황해도지방에서 전교활동을 벌이던 베르뇌 주교로 부터 영세를 받은 것이다. 이후 강화석은 일생동안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며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문한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여러차례 체포되지만 강화석은 부친의 영향력으로 풀려난다. 결국 병인박해를 피해 1870년 중국으로 건너간 강화석은 이곳에서 한어를 공무하는 리데주교를 만나게 되고 한불자전(韓佛字典)의 편찬을 비롯해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등지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서양문명을 접하게 된다. 일본 고베와 상하이를 오가며 일어와 영어를 배우게 된 강화석은 1882년 10월 민영익,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함께 상하이에서 10여년만에 귀국한다.
귀국후 조선해관 창설업무를 담당하게 된 강화석은 1883년 조선 해관이 설치될때 방판에 임명돼 처음 관직에 나선다.
그러나 강화석이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887년 3월16일 교섭아문(交涉衙門)의 주사직급으로 인천 해관의 방변에 발령된 뒤부터의 일이다. 이해 11월16일자로 주 일본 조선공사관에 파견돼 1년간 근무하다 귀국해 다시 인천항 서기관으로 일했다. 1893년에는 강화수군 총제영(總制營)에서 운영하는 학당의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교섭아문의 주사로, 1895년에는 농상공부 주사로 근무했다.
청일전쟁의 수습차 2개월간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해 5월 개항장에 새로 경무청관제가 실시되자 제물포 경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1896년에는 개혁법령 제1호 재판소구성법이 제정공포됨과 함께 한성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됐다. 당시 한성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는 일반 민형사 사건 외에도 외국인과 조선인간의 민형사 사건을 재판했고 원칙적으로 단독판사가 재판권을 행사했다. 해관 업무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뒤로 강화석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으로 일본과 청나라를 내왕하며 중요한 외교적 현안을 관장했고 귀국해서는 경무청 경무관, 재판소 판사 등의 직책으로 새로운 근대적 제도를 안착시키는데 일정 역할을 해나갔다.
1897년 9월19일 강화석은 복설된 감리서 제도에 따라 인천항 감리 겸 부윤 겸 판사(종3품)로 임명됐다. 복설된 감리서의 감리는 각국 영사 교섭과 조계 및 항내 사무일체를 관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1895년 이전의 감리 업무보다 그 업무가 확대됐다. 여러 개항장 중에서도 가장 큰 인천 개항장에 그가 감리겸 부윤으로 임명됨으로써 그는 '새인천'의 근대적 제도화의 선두에 서게 됐다. 게다가 당시의 감리는 학교관제에 따라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인천상업학교의 전신)의 교장직을 겸임하게 됐다. 강화석은 그 교장직까지 수행했다.
러나 그가 인천항 감리로 부임한 기간은 고작 3개월 정도였다. 징계를 받고 갑자기 감리에서 해임됐던 것이다(관보 광무 원년 9월22일자). 징계의 사유는 천주교 신자를 경무청의 순검으로 채용한 것에 반감을 품은 경무사 및 감찰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징계는 1898년 4월에 풀려 6월에는 중추원 2등 의관(議官)으로 임명된다. 한달만에 다시 외부(外部) 참서관으로 임명돼 2년간 일하다 1900년 농상공부 기사주임 1등으로 전임됐고 1902년 8월에는 박람회(博覽會) 위원까지 겸임했다. 1904년 농상공부 참서관 주임 1등으로, 1907년 6월에는 서기관으로 승진돼 정년을 마쳤다.
관직에서 물러난 강화석은 인천천주교회의 박문학교, 사립 오성학교 및 서울 종협천주교회의 계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00년 9월1일 김교원, 아들 강준은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초급과정을 교육하기 위해 '천주학방'으로 박문학교를 설립, 1908년 학생수 55명을 헤아렸으나 일제의 사립학교명 반포로 개인으로 운영이 어려워 1909년 12월8일 인천본단에 운영권을 인계, '인천항사립박문학교'로 개칭됐고 인천본당의 주임인 드뇌 신부가 설립자가 됐다. 강화석은 1917년 반신불수병을 얻어 황해도 수안지방의 들무정이라는 곳으로 거쳐를 옮겨 살게된다. 그가 수안지방으로 옮긴 이유는 그의 뒤를 이어 인천 해관에서 근무하던 아들 강준이 1910년 경술국치 후 관직을 사임하고 영국인이 경영하는 수안광산의 총지배인 겸 영어 통역관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안지방에서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해 영향력이 컸던 아들 강준 곁에서 강화석은 병고를 겪으면서 10여년동안 죽음을 준비했다.
강화석의 천주교 입교이후로 그의 집안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 아들 강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강화석의 손녀이자 강준과 유마리아 사이의 둘째딸인 강마리아는 어린 나이에 수녀가 돼 종교생활에 정진하다 1918년 11월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강화석은 1926년 3월2일 생을 마감한다. 강준 역시 1933년 신장병으로 서울에서 입원 요양중 사망한다.
가톨릭 기관지인 '경향잡지'는 가톨릭 유력신자인 강화석의 사망소식을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강화석은 조선이 근대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해관, 경무청, 재판소, 감리서, 외부, 농상공부 등의 다양한 부서에서 여러 업무를 통괄하며 근대제도가 안착하는데 있어 적지 않은 실무의 중책을 담당한 직업적 행정관료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비단 관직의 공무에 한정해 활동한 인물만이 아니라 인천을 주무대로 삼아 종교와 교육, 계몽운동에 걸쳐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아들 강준과 함께 설립한 인천박문협회는 독립협회 인천지부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인천의 자주적 근대화를 모색한 민족운동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 김신태·sintae@kyeongin.com
'독립협회 인천항지회'…문명개화의 산실
인천박문협회는 1898년 6월8일 결성됐다. 1898년 6월25일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중 가장 큰 규모와 활동을 자랑하는 협성회(1896년 11월30일 창립)에서 발행하는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는 당일 잡보란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소식을 최초로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인천박문협회는 관보와 각처의 신문 및 시무상에 유익한 서책을 구비해 놓고 모든 회원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하고 연설해 지식과 학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됐다. 회원은 설립되자 순식간에 100여명에 이르렀다.
1898년 7월4일 '박문협회 회원의 연설'이라는 논설(독립신문)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취지는 외세의 침탈 아래 놓여있는 대한제국을 일으켜 세우는 애국자강운동 노선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후 1898년 10월15일 인천박문협회가 독립협회의 인천항지회로 정식인가 된다.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인천박문협회의 자강운동은 자연스럽게 교육계몽사업으로 이어졌고 협회창설 한달여만에 회관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야간영어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이 사립영어학교는 1900년에 설립된 인천항사립박문학교(현 박문초등학교)의 모태가 된다.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했던 강준은 후일 인천항사립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며 현재 박문초등학교의 학교명칭은 독립협회의 자매단체로 활동하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인천박문여자중학교는 박문초등학교에 이어 세워진다.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강화석으로, 그는 아들 강준과 함께 인천박문협회의 운동노선을 정했고 그를 중심으로 인천해관과 외국상사, 교회와 관공서 등에 종사하는 인천의 신지식인들이 모여 다양한 계몽운동을 펼친 단체가 바로 인천박문협회다.
그러나 인천박문협회는 1898년 12월말에 강제해산된 독립협회운동의 운명과 함께 신문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박문협회의 '박문(博文)'이란 이름은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의 '박학어문(博學於文) 약지이례(約之以禮)'란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