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인천의관광/인천풍경
2006-11-03 22:56:48
월 미 도 - 月 尾 島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北城洞)에 있는 육계도(陸繫島)이다. 지명은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처럼 휘어져 있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1900년대 초까지 부천시 영종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9월 1일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원래는 인천역에서 서쪽으로 1km 거리에 있는 면적 0.66㎢의 섬이었으나, 1920년대 초 돌축대를 쌓아 내륙과 연결되면서 세관검역소·측후소,무선전신국을 비롯한 각종 기관들이 들어섰다. 현재 해안도로에는 놀이시설과 유흥시설이 늘어서 있으며, 1987년 7월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문화예술 공연과 월미축제 등 각종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현재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 내항(內港) 북서쪽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이 섬은 역사적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1895년 영국 순양함이 월미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군인 448명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으며, 1904년 2월 9일 소월미도 앞바다에서 러시아 전함이 일본 전함과 부딪쳐 침몰하면서 러일전쟁의 발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인천항의 개항 전후로는 외세의 각축으로 수난을 겪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지였으며, 1950년 이후 오랫동안 국제연합군이 주둔하였다. 188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인천 앞바다에 정박했던 프랑스 함대의 대장 이름을 따서 한때 외국 지도에 로즈섬(Rose Island)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풍운’의 역사를 간직한 월미도
월미도(月尾島)는 예나 지금이나 인천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곳 중 하나다. 월미도는 인천의 역사,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월미도는 조선 말 병인양요(1866년)를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이 문호개방의 압력을 넣었던 진원지였다. 개항(1883년) 이후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에 굴복해 ‘제물’로 바쳤던 곳이다.
하지만 월미도에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일본자본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일 합병에서 해방 전까지 전국 최고의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월미도는 다시 ‘전쟁의 상징 터’로 시련을 겪어야 했다. 6.25 이후 50여년 동안 미군기지와 우리의 해군기지로 사용하는 바람에 시민들에게 좀처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금지’였다. 월미도가 수난의 세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열강들이 서울을 공략하기 위해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그 길라잡이 노릇을 한 곳이 월미도였다. 따라서 월미도는 서울 침략의 거점으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함대 사령관 로제(Pierre Roze)의 이름을 따서 해도에 ‘로제 섬’이라고 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개항 후 월미도는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의 세력 다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887년 일본은 우리 정부와 월미도지소자입계약서(月尾島地所借入契約書)를 쓰고 월미도를 찬탈의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 외국인의 토지소유는 개항장 10리 밖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10리 이내에서도 토지소유와 개간에는 법적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외국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이 때문에 일본인은 한국인 이름을 빌려 개항장 주변의 간석지와 황무지를 개발한 뒤 소유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대상지가 월미도였다.
그 뒤 일본은 1891년 1월 매년 80원(圓)의 지세를 조건으로 우리 정부와 월미도묘지 조차계약을 체결하고 월미도에 석탄창고와 군수시설을 설치했다. 월미도를 군수기자화하려는 ‘계략’이었다. 일본에 ‘밀린다’ 싶었던 러시아도 1896년 8월 조차계획서를 내고 월미도 남서쪽 1만3천400여평을 빌려 석탄창고를 세웠다. 미국 석유회사 ‘스탠더드’도 1897년 12월 월미도에 석유저장소를 건립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일본은 1904년 8월 월미도에서 다른 열강들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월미도에 있던 민가 50여 채와 묘지를 강제로 철거하고 해군기지를 조성했다. 이와 함께 소월미도를 군용품저장소로 만들어 지금의 문화의 거리를 잇는 나무다리를 놓고 철도까지 연장했다.
월미도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결정적인 계기는 1914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정했던 각국 지계의 해체였다. 일본인들에게 인천 전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셈이었다.
더욱이 그 해 9월 월미도는 인천에 편입돼 일본인들의 땅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 4월 월미도 동쪽 해면을 돌뚝으로 막아 1천689평을 매립하도록 인천선거주식회사에 인가했다.
그 이듬 해에는 인천 내항에 도크를 건설하면서 한강에서 밀려드는 토사를 막고, 나룻배로 오가던 불편을 덜겸 지금의 대한제분에서부터 월미도 돌출부(지금의 대한제당 인근)까지 1㎞에 달하는 2차선 둑길(堤道)의 축조를 허가했다.
월미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일본은 월미도 산 중턱에 순환도로를 내고 도로 변에는 벚나무를 심어 섬 전체를 가꿨다. 1918년에는 풍치지구로 지정했다.월미도의 벚꽃놀이는 전국에서도 이름 나 있었다.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를 개통한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20년 4월 월미도 벚꽃놀이를 위한 경인선 화열차(花列車)를 별도로 임시 운행할 정도였다.
철도국은 유명세를 탄 월미도를 임해 유원지로 개발했다. 소형 해수풀장과 오늘날 해수탕 격인 ‘조탕’(潮湯)을 만들었다.
관리권을 넘겨받은 ‘월미도 유한회사’는 월미도 인근 7천평을 매립해 유락시설을 만들었다. 1935년 무렵에는 3층 목조건물인 빈(濱)호텔을 건립했다. 해변가에 50m 대형 풀을 증설하고 밀물 때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설계한 일본식 요정 ‘용궁각’(龍宮閣)도 세워 1937년 6월 영업에 들어갔다.
봄에는 순환도로에 만발한 벚꽃을 즐기는 인파, 여름에는 해변가 수영장에 헤엄치는 인파로 월미도 전체가 북적거렸다. 인천우체국이 1924년 월미도에 자동전화를 설치해 ‘돈벌이’에 나설 정도였다.
인천의 승용자동차영업의 효시였던 별부자동차부(別府自動車部) 등이 밀려드는 인파를 나르기 위해 1924년 4월 월미도 왕복버스를 운행하기도 했다. 월미도 왕복버스는 4월부터 10월까지 오전 8시∼오후 10시 30분마다 운행했다.
‘관광단지’ 월미도는 일본 패망까지 20여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해방 이후 월미도 유원지는 시들해졌다.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월미도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 옛 명성을 다시 찾고자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진 못했다. 그러다 한국전쟁 당시 ‘9.15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폭격으로 월미도는 초토화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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