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기(帥字旗)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5-09 00:32:14
수자기(帥字旗)
미추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겪은 5년 뒤, 인천은 또다시 외국 함대의 침입을 받았는데 그것이 신미양요(辛未洋擾)다. 병인양요가 프랑스와의 종교 문제로 비롯된 것이라면 신미양요는 미국과의 통상 문제가 발단이었다.
1871년 4월(이하 음력), 미군은 셔어먼 호 사건을 빌미로 콜로라도 호를 위시해 군함 5척과 병력 1천2백30명을 이끌고 물치도(현 작약도) 해상에 나타났다. 프랑스 신부 리델이 안내역을 맡은 불미(佛美)합작의 침공이었다.
23일 미군은 초지진을 점령했고 이튿날에는 해병대가 덕지진을 함락시켰다. 그날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장수 어재연(魚在淵)을 비롯한 장병 350여명이 모두 전사했다. 반면에 미군은 3명만이 전사했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미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고 25일 물치도로 철수했다. 그러나 5월 상순이 지나도록 조선 정부가 타협을 하지 않자 5월 16일 제풀에 지쳐 철수해 체푸(현 산동성 연대시)로 떠났다.
그때 광성보 전투에서 약탈당한 '수자기(帥字旗)'가 미국 매릴랜드 주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것은 강화군에서 발행한 '신미양요 기록 사진집'에 이미 나와 있는 내용이나 반환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은 초문이다.
새삼 역사의 무상함을 느낀다. 1871년 인천 주둔 조선군에게 '피의 빚'을 진 미군이 79년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그를 되갚았던 것이나 빼앗겼던 호국의 상징물을 3세기 만에 되돌려 받을 것이라니 그렇다. 지역사회 차원에서 미리 손을 못 쓴 아쉬움은 있지만 기(旗)의 고향인 '강화(江華)'에서 소장하였으면 한다.
진혼(鎭魂)과 역사적 반추의 자료로 삼자는 것이다. /조우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