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으로 보는 중국근대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16:42:56
저자명 백영서
발행자 한샘
발행일 1987-01-01
제 목 짜장면으로 보는 중국근대사
내용 짜장면으로 본 중국 근대사
즐겨 먹는 짜장면도 시대의 필연적 산물
짜장면과 오징어가 어느 정도 물릴 때 비로소 청소년 티를 벗고 어른이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고유의 음식도 아닌 짜장면이 그만큼 우리 생활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짜장면을 그저 즐겨 먹는 데 그치지 말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그것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된 내력을 따져 보자. 그러면 짜장면은 더 이상 1,500원 짜리 음식에 머물지 않고, 우리에게 중국 역사를 보여 주는 하나의 창으로 변한다. 짜장면은 누구나 다 알다시피 화교 곧 중국인 이민자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 낸 국수 종류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우리 나라가 교류한 것은 저 멀리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중국인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이다. 1876년에 우리 나라를 개항시킨 뒤,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그때까지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청나라)과 다퉜다. 점차 세력을 키워가는 일본을 견제해 오던 중국은 임오군란을 기화로 군대를 파견하면서, 조선을 자기 쪽에 끌어 넣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인들의 조선 진출을 돕기 위해 여러 차례의 통상 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중국인들은 잇따라 이곳에 건너와 갖가지 직업을 갖고 생활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신들의 고향을 등지고 이곳에 흘러들어 온 것인지 한번 따져 볼 필요를 느낀다.
공교롭게도 이곳을 찾아온 화교의 94%가 산동성 출신이다. 산동에서 인천으로 직접 건너오거나, 아니면 만주를 거쳐 육로를 이주해 온 그들은 1900년을 고비로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1980년도 주한 중국 대사관 통계), 유교의 영향으로 조상이 묻힌 고향과 혈족에 남달리 강한 애착을 지닌 중국인이 고향을 등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삶 그 자체를 위협할 정도의 위기 상태가 아니라면 다른 나라로까지 옮겨 갈 리가 없다. 여기에서 펄벅의 소설 『대지』의 주인공 왕룽 일가가 큰 홍수를 만나 먹고 살 길이 없자 도시로 이주하는 처절한 대목을 떠올리면 혹 이해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산동 출신이 특히 1900년 이후 많이 이주했다는 것은 산동 지역의 중국인들이 그 무렵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위기에 빠져 있었던 탓이라고 추축할 수 있다. 1900년 무렵 중국의 이 지역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1898년부터 산동에서는 서양인을 내쫓자는 민중 운동이 전개되었다가 1901년 서구 열강에 의해 탄압당하고 만 일이 있었다(의화단 사건). 이 과정에서의 혼란과 좌절로 생존의 위기를 느낀 산동성 주민들이 이주해 온 곳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 나라이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 정치적 혼란이 빚어지거나,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먼저 이주해 온 고향 사람들의 연줄을 따라 산동 주민들이 계속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서구 열강의 군사력에 와해되는 중국
그렇다면 의화단 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그것은 중국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해진다. 짜장면에 대한 관심이 마침내 우리를 중국사(특히 근대사)의 한복판으로 이끈 셈이다.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지나가 버린 시기에 발생한 사건의 연대기를 외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바다에는 출렁이는 파도 밑에 고요한 심연이 있듯이, 역사에도 표면의 사건을 떠받치는 구조가 있다. 특히 주도적인 사회 세력들의 상호 작용이 빚어내는 역동적인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전통 시대 중국은 통일 국가를 형성한 진시황의 진제국 이래 (B.C.221년) 청왕조가 무너진 1911년까지 거의 2천 년 동안 제국적 질서가 유지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긴 기간에 흔히 서양인들이 말하는 '동양적 전제주의'의 사회가 지속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모든 권한을 차지한 황제의 의지만이 작용하는 왕조가 순화적으로 바뀔 뿐, 중요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 뒤떨어진 역사를 이룬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야의 역사가 걸어 온 길 그대로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황제권·관료 지배층·민중이라는 세 사회 세력이 맺는 힘의 관계는 부단히 바뀌었으며 그것이 바뀌는 데 따라 중국의 역사는 나름대로 변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중국의 역사가 서양의 역사에 비해 제자리걸음 만 한 후진적인 것이었다고 보는 것은 서구적인 편견의 소산이다. 우리가 자칫하면 미개하다고 보기 쉬운 아프리카 흑인들도 서구와 접촉하기 이전에 입으로 전해 온 훌륭한 역사를 쌓아 올리고 있었음은 알렉스 헤일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소설 『뿌리』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던가.
이렇게 중국인이 꾸며 온 나름대로의 역사 세계를 외부에서 비집고 들어와 흐뜨려 놓는 일이 19세기에 발생했다. 영국을 앞세운 서구 열강이 자기 나라 안에서 남아도는 상품을 팔고 부족한 원료를 구입해 자기 나라를 살찌우려고 땅 넓고 자원 풍부한 중국을 찾아왔던 것이다. 처음에 중국은 서구 열강과의 교역을 거절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우월한 군사력을 이용해 자신의 요구를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과 열강 간의 계약인 조약이 맺어졌다. 본래 근대적인 계약이란 당사자 간의 평등한 관계에서 이뤄진 약속이나, 이 경우는 교역 조건이 중국에 불리할뿐더러 중국 영토의 일부마저 떼어 갖도록 허용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이로써 중국은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서구 열강에 종속되었다.
백 일 만에 좌절된 중국의 자강 운동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중국인에게 주어진 과제는 서구 열강에의 종속에서 벗어나 대등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중국인 누구에게나 꼭 같지는 않았다. 중국을 움직여 온 황제권·관료 지배층·민중의 세 세력은 그 실현 방법에 대해서 제각기 현실적인 이해 관계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나타냈다. 당시 황제권을 쥐고 있던 만주족 출신의 청왕조는 이제까지의 제국적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변화를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영국과 벌인 두 차례의 전쟁(제 1,2차 아편 전쟁)에서도 전쟁의 확산을 피하기 위해 타협적인 자세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원래 이 전쟁에서 중국은 서구 열강의 군대가 수도 북경에 쳐들어와 궁궐조차 불지를 정도로 쫓기기도 했거니와 오래 끌면 민중이 동요되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더욱 그 종결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왕조로 상징되는 제국적 질서의 틀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던 관료 지배층에게는 청왕조가 너무 허약해지는 것이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고위 관료층은 청와조를 움직여 스스로 부강해지기 위한 운동을 추진했다. 그 운동의 모범이 되는 국가는 당시 부강한 국가로 여겨진 서구 열강이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적 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처음에는 주로 서구의 군사와 공업 기술만 들여 왔다. 곳곳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를 만들고, 광산을 개발하여 제철소를 새로 세웠으며, 방직 공장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익히기 위해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하여 양무 운동(洋務運動)이라고도 불리는 초기 자강 운동(自强運動)으로 어느 정도 근대적인 군비와 공업 시선을 갖추게 되었을 때, 일본과의 전쟁(청·일 전쟁, 1894∼1895)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에 일본이 우세해지자, 중국은 전쟁의 종결을 서둘렀다.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4대국의 도움을 얻어 일본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맺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 중국의 복속국이었던 일본에게 패했다는 사실은 중국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게다가 전쟁의 마무리를 도운 강대국들은 이 틈을 노려 중국 영토를 나눠 지배하려고까지 했다. 나라가 곧 망해 버릴 것 같은 위기 의식이 중국인을 사로잡았다. 이때 젊은 하위 관료 지배층은 이제까지의 자강 운동이 군사·공업에 한정된 것이었기에 근대화에 앞선 일본에 지고 말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 제도 자체의 개혁 운동이 청조의 젊은 황제 광서제를 움직여 한때 정책으로 실현될 기회를 얻었다〔이것이 1898 년에 이뤄졌으므로 그 해의 간지를 따라 무술(戊戌) 개혁 운동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보수 세력과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에게 밀려, 100일 만에 개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중국 민중의 공동체
서구 열강이 미친 충격에 대응하여 황제권(청조)과 관료 지배층이 연출하는 정치 변혁에 민중이 직접적으로 참여할 길은 없었다. 예로부터 민중은 생산 활동의 주된 담당자로서 제국적 질서를 떠받치는 기반이었다. 민중의 대다수인 농민은 피와 땀을 섞어 농사를 짓고 그 생산물의 일부를 조세로 바쳤다. 그리고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가 요구하는 데 따라 정기적으로, 또는 부정기적으로 부역을 제공해야 했다. 이같은 부담을 진 그들에게 돌아오는 대가라고는 제국적 질서 속에서 누리는 최소한의 안정이 고작이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해야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가 과거에 합격해 관료로 진출하는 것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권이 문란해지고 관료층의 부패가 극심해지며,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 재해까지 겹쳐지면 최소한의 안정은커녕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럴 때 농민들은 농기구를 무기 삼아 반란을 일으켜 정치 세계로 뛰어들었다.
중국의 농민 반란은 대개 균등 분배를 기치로 내세웠지만, 왕조의 교체를 낳았을 뿐, 제국 질서를 뒤엎는 개혁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민중은 안정만 찾아오면 나날의 생활을 풍족하게 가꾸기 위해 꾸준히 씨앗의 품종을 개량하고 비료를 개발하며 수리 시설을 향상시켰다. 또 남은 힘을 이용해 부족한 가계를 보충하기 위해 가내 수공업을 일으켰다. 이것은 정녕 중국 역사를 진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이같은 민중의 세계가 서구 열강이 진출해 왔다고 해서 당장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은 만성적인 불안정을 가져왔을 뿐더러, 중국이 패전으로 떠안은 전쟁 배상금은 결국 조세로서 민중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서구의 상품이 농촌에까지 흘러들어와 농촌의 가내 수공업은 몰락했고 당시 화폐인 은은 대량으로 해외로 빠져나갔다. 관료 지배층이 추진하는 자강 운동에 드는 비용도 농민의 부담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서구와의 접촉 이래 민중의 생활은 불안정해지고 궁핍해 갔다.
이러한 사태를 이겨 내기 위해 민중이 택할 수 있는 길의 하나는 자기들끼리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숱한 민중 종교들이 발생했다. 그 가운데 상제회가 있었다. 그 교도들은 소규모 공동체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살기좋은 천국을 현실 속에서 건설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민중들과 같이 1853년,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수립하였다.
북부로 확산된 민족주의 운동
태평천국에서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중국 고유의 사상(예컨대, 유교의 대동 이념과 농민 반란의 균등 분배 이념)을 조화시킨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정책을 제시하였다. 토지를 농민에게 공평히 분배할 것을 내세우고,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노예 매매와 축첩을 금지시켰다. 또한 산업 발전을 계획하며, 서구 열강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것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제국적 질서를 뿌리째 파헤치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기에 청조의 관군이 진압하지 못해 중국의 남부와 중부를 태평천국이 차지했다. 그러나 이에 불안을 느낀, 지주이자 지방 연고지의 유력자인 관료 지배층의 일부는 향용이라는 민간의용군을 조직해, 서구 열강의 지원 속에 이 난을 진압했다. 태평천국의 실패 이후 민중의 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었다. 민중은 어째서 이렇게 생활이 악화되는지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단지 민중의 생활 세계에 느닷없이 찾아온 서양 선교사가 모든 변화를 몰고온 원인으로 비쳤을 뿐이었다.
중국의 이곳저곳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반기독교 운동이 번져 갔다. 중국의 북부에 위치한 산동 지역은 중․남부보다 서양인과의 접촉이 뒤늦은 곳이었다. 청일 전쟁 이후 독일군이 이 지역에 나타나 주민들과 탓으로 돌렸다. 자신들의 삶을 뒤흔드는 '서양 귀신'에 대한 증오는 이 지역 주민의 호신술이었던 의화권(義和拳) 조직을 통해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이것이 1898년에서부터 1901년까지 계속된 의화단 사건이었다. 그들은 당시 번지고 있던 반기독교 운동처럼 선교사는 물론이고 서양적인 것이라면 남김없이 파괴하였다. 중국을 나눠 지배하려는 서양인들을 내쫓고 중국을 보전하자는 그들의 주장에 호응이 컸다. 사태는 중국 북부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끝내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하찮은 사물에서 인류 역사를 본다.
청조는 의화단 사건 덕에 열강의 분할 지배의 위기에서는 일단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구조적으로는 열강에 더 깊이 종속되어 버렸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서구 열강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대등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표의 실현은 결코 쉽지 않았다. 황제권(청왕조)관료 지배층 민중이 제각기 현실적인 이해 득실을 따지면서 그 나름으로의 대응 방식을 모색했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청왕조가 망하고 공화정이 들어선 1911년의 신해 혁명 뒤에도 군벌과 제국주의가 여전히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에 찬 중국 근대사의 줄거리이다. 중국인라면 누구나 중국 근대사의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고난을 겼었지만, 그 속에서 일상적인 삶조차 제대로 이어가기 힘들었던 대다수 민중의 고통은 남달리 가혹했다. 그래서 삶의 뿌리를 뽑힌 민중의 일부는 도적떼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낯선 땅에서나마 새로운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이들이 바로 한국, 일본,동남아, 더 멀리는 아메리카까지 진출한 화교들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 근대가 안고 있는 모순이 화교를 낳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그릇의 짜장면이 있게 되기까지의 내력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중국 근대사의 흐름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짜장면은 고난을 극복해 온 중국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의 일부일 수도 있다. 짜장면처럼 쉽게 지나치기 쉬운 하찮은 사물일지라도 섬세한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인류 역사의 큰 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백영서/ 현재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저서로는 '중국사회 성격 논쟁', '국민 혁명의 분석적 연구' 등이 있다.
출전 월간 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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