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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3·1절 특집 - 인천에 남은 흔적들

by 형과니 2023. 3. 9.

지금도 그 뜨거운 외침이 들리는듯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04:56:02

 

지금도 그 뜨거운 외침이 들리는듯

오늘로 남아 그날을 증거하는 역사적 현장

 

<3·1절 특집 - 인천에 남은 흔적들>

 

 

세월이 흘러도 결코 지워질 수 없고 지워져서도 않되는 역사가 있다. 오늘을 사는 이들이 지난 삶을 살았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열정과 헌신, 용기는 오늘을 있게 한 힘이 분명하다.

인천 곳곳에는 역사적인 사실과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이들을 증거하는 흔적들 여럿이 있다. 3·1절과 연관있는 그곳을 둘러본다.

 

 

 

계양구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계양구 장기동에 황어장터는 1910년대에 가장 번창해 이용주민이 하루 1천여 명에 달하는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이곳은 본래 조선시대부터 잡화 및 곡물뿐만 아니라, 1일 거래량이 500~600두에 이르던 인천지역의 대표적 우시장이기도 했다.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황어의 산지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1919324일 당시 장날을 이용해 강서지역 최대의 만세운동이 이곳에서 벌어짐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지금은 장이 서질 않는 대신 이 자리에는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오롯이 서 있어 지난날의 의로운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지난 86년 일제시대에 기록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원부에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연루돼 수감된 당시 계양면 주민 33명의 신상과 정황 등 긴박했던 만세현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황어장터 3·1만세 운동은 장날인 기미년 324일 오후 26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고 심혁성 지사(당시 32)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비롯됐다. 당황한 일제는 즉각 진압작전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일본순사가 휘두른 칼에 많은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더욱 격분한 주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일제 경찰에 심 지사가 체포되고,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이은선 지사(당시 44)가 일경의 칼에 맞아 순국하고, 윤해영 지사는 중상을 입었으며, 야간집회를 준비하던 100여명이 검거되고 32명이 경찰서로 압송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후 6개월 뒤 경성지방법원은 검거자들에 대해 이담 지사(당시 41)는 징역 2, 임성춘 지사(당시 47)는 징역 1, 전원순(당시 45최성옥(당시 48)지사는 징역 10, 심혁성 지사(당시 32)는 징역 8, 이공우 지사(당시 44)는 벌금 20원의 판결을 각각 내렸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강서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의거로 기록되었고, 인천지역은 물론, 전국의 만세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을 기려 계양구는 2004년에 총 337평에 한옥으로 된 전시실과 기념탑, 조경시설 등을 갖춘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어 기념관이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받음으로써 황어장터와 관련한 역사적 자료가 계양구에 국한된 시설이 아닌 국가의 시설로 그 의미와 가치가 한층 높아졌다.

이용문의 : 계양구 문화공보실(032-450-5871~6)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

 

인천 3·1운동의 불씨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서 지펴졌다. 당시 인천의 유일한 공립보통학교였던 4년제 인천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3·4학년들이 36일 정오에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합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인 것이다.

 

이를 기념하는 3·1 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가 창영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워졌다. 창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당시의 고증 자료를 수집하고 재판 기록문을 입수해 1995년 모교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에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옥고, 징역, 부역을 당한 동문의 명단과 현황이 빼곡히 적혀있다. 뒷면에는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바탕한 의사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라는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김명진의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상고문을 발췌해 새겨 넣었다.

 

용유동 삼일독립만세 기념비

 

기미년 삼월일일의 만세운동은 비단 내륙지방에서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의 용유도에서는 323일 조명원, 조정서 등 열 한명이 혈성단이라는 비밀 항일 투쟁단체를 결성하고 만세 격문을 배포한데 이어 28일에는 관청리 광장에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비록 일본의 무력에 무참히 짓밟혀 옥고를 면치 못하고 독립을 찾지는 못했지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는 바다와 육지에 한결같이 일렁였다.

 

공항고속도로 신불IC를 거쳐 공항남측도로를 달리다 용유도 방면으로 접어들면 덕교삼거리를 지나 용유중학교 옆에 용유쉼터가 조성돼 있다. 쉼터에는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인 삼일독립만세 기념비가 서 있어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게 한다. 기념비에는 애국애족’‘지성보국이라 적힌 두 기둥위에 검은 대리석으로 만세운동의 현황과 추도시, 용유8경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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