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관거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9:28
청관거리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는 지금도 청관(淸館)거리로 불린다.「청관」이란 공식지명이 아니라 구한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국 조계(租界·19세기 후반 중국과 한국 등에 형성됐던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 외국인이 거주하면서 상업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기도 했다)를 통칭하던 말. 그러나 조계가 폐지되고 나서도 이 명칭은 계속 사용됐다.
인천에 청관이 들어선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종 21년(1884년) 조선의 종주국(宗主國)을 자처하던 청국은 일본이 자기네보다 먼저 우리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조계를 설정하자 서둘러 뒤따랐다.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청국은 선린동(善隣)이란 이름도 이웃나라와 친선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지었다) 일대 5천여평을 조계로 정했다.
청국은 여기에 영사를 설치하고 인근에 화교들이 소매잡화점포와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화교 상인들이 몰려들자 조계를 확장하는 등 상권을 본격적으로 형성했고, 사람들은 이 곳을 청관이라 불렀다. 그러다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국력이 쇠퇴해지자 사람들은 화교를 비하하는 명칭으로 쓰기도 했다.
「인천 한 세기」의 저자 愼台範씨(88)에 따르면 청국지계는 현 중앙동과 선린동 사이에 있는 옛 중화루를 거쳐 자유공원 한국회관 앞 언덕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리고 지금의 舊 북성동 사무소가 있는 큰 길이 중심지 구실을 했고, 이 길을 따라 「同順泰」를 비롯 「仁合東」, 「東和昌」 등 청국 거상들이 운영하는 큰 점포가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한다. 청관 일대 점포들은 도로변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대개 벼랑에 붙여 지은 것이어서 해안 쪽에서 바라보면 5~6층 짜리 건물처럼 보였다.
愼씨는 『청관거리가 형성될 무렵엔, 지금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어 없어진 존스톤 별장, 영국 영사관, 세창양행 기숙사 등 우아한 양식 건물과 조화를 이뤄 항구 쪽에서 바라보면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중국에서 건너 온 화교 1세들은 고유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관거리엔 볼거리가 많았다. 중국에서 큰 명절의 하나인 설날 제야놀이부터 시작해 원소절(元宵節)이라 불리는 대보름날에 끝나는 春節 15일 동안 청관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집집마다 복을 기원하는 글을 빨간 종이에 써서 붙이고 색등을 걸었으며, 해가 저물면 긴 장대 끝에 폭죽을 수백개씩 달아 놓고 불꽃놀이를 즐겼다.
50년대 까지만 해도 이런 광경은 흔했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자취마저 사라진 상태다. 또 청관에 있던 중국 절에서는 노덕술관장이 중국 전통무술인 18기를 가르쳐 화교들은 물론 인천지역 무인들도 자주 찾았다.
장례식 때 종이로 만든 인형을 태우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색다른 모습이었다. 화교들은 죽으면 대부분 현 시립 인천대학교 일대 산에 묻어 중국인 묘지군을 이루기도 했다.
그 무렵 인천의 화교들 역시 여느 화교들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상술을 발휘했는 데, 1930년대 초 까지만 해도 10여개 대화상들이 중국 산동성 지역에서 소금과 각종 곡물을 들여왔다. 한염해운의 전용두부(지금의 인천역 일대)였던 염부두 앞 바다에는 독특한 꼴을 한 검은색 중국 풍선(風船)이 호염(胡鹽)이라 불리던 천일염을 비롯 고추, 잡곡, 지물류를 싣고 들어왔다. 아울러 인천에선 건어물과 해삼, 새웃살, 조갯살 등 해산물을 갖고 나갔다.
이때 화교 인구가 3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화교들이 얼마나 번창했는 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은 거의 마비되고 일부 요리집과 잡화상들만 남았다. 전쟁 직후 일제에 의해 활동을 제약받던 20대 젊은 화교들은 대만이나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남은 화교들은 중국음식점과 잡화상을 운영하거나 지금의 남구 주안·도화동 일대에서 비교적 큰 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살림이 어려웠던 일부 화교들은 일제가 축항을 건설하면서 부두 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20년대 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청관거리는 청요리로 명성을 떨쳤다.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송죽루) 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3대 요리집」으로 통했다. 지금은 장사를 하지 않지만 공화춘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어 이를 보는 나이 지긋한 인천인들을 추억에 잠기게 한다. 현재 터만 남아 있는 중화루는 청관을 대표하는 4층 건물로서 이후 대불호텔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다 헐렸다.
인천지방경찰청 인근 기독교백주년기념탑 맞은 편에 위치했던 송죽루는 동양석유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관거리엔 현재 1백70여가구 5백여명의 화교들이 살고 있다. 그 유명했던 중국요리집들은 세월의 뒤켠으로 사라졌지만 지금도 이 곳엔 화교 2·3세대들이 풍미를 비롯 자금성, 중화루, 진흥각 등을 운영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원로인 새얼문화재단 張@睦고문(80)은 옛 중화루에는 북경에서 건너 온 周사부란 일급 주방장이 만드는 정통 북경요리를 맛보기 위해 서울을 비롯 전국 각지의 미식가들이 자주 찾았다고 전한다. 전성기를 누리던 40년대를 전후해 이들 청요리집에선 10~12원을 주면 한 상에 8~10가지 요리(술값은 별도)를 맛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반 사무직 사원의 월급이 50~60원 정도였다고 하니, 요리값이 굉장히 비싼 셈이었다.
張고문은 『당시 중화루 사장이 단골들에게 1백원_2백원 어치의 외상을 주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던 젊은 직장인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찾았으며 일부는 늘어난 외상값을 갚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차이나 타운 자장면
「청관거리」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자장면을 파는 중국음식점이다. 구한말 당시엔 청나라 사람들이 운영하던 음식점이란 뜻에서 「청요리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국음식점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무렵 항구를 통한 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 무역상을 대상으로 한 중국음식점들이 생겨났다. 중국의 대중음식을 처음으로 접했던 우리 서민들은 색다른 맛과 싼 가격에 놀랐다. 화교들은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볶은 춘장(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서 먹는 「자장면」. 자장면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 졌는 지를 밝혀줄 만한 관련자료는 거의 없다. 청관거리에서 3대째 중국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자금성」의 孫덕준사장(43)은 『누가 처음으로 자장면을 만들어 팔았는 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일제 때 화교들이 인천항 근로자들을 상대로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중국 된장을 볶아 삶은 면에 얹어 팔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차이나 타운 공화춘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은 1905년 개업한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 있지만 일제 때부터 청요리로 이름을 크게 날렸던 곳이다. 당시 공화춘은 한_일 양국의 상류계층이 출입하던 고급 요리집이었다. 이렇게 「공화춘」이 성업을 이루자 화교유지들은 돈을 모아 인근 일본촌 번화가에 있던 3층 벽돌건물이었던 「대불호텔」을 사들여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중화루」의 문을 열었다.
「중화루」는 서울의 「대관원」보다 건물이 웅장하고 요리 맛도 월등했다고 한다. 이 곳에는 북경에서 건너 온 「周사부」라고 불리던 일급 주방장의 정통 북경요리를 맛보려고 서울을 비롯 경향 각지의 미식가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으로 청관거리에 「동흥루(이후 송죽루로 불렸다)」가 연이어 문을 열면서 인천은 「청요리」의 본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밖에 지금의 중구 경동 상업은행 앞 싸리재약국 밑에 있었던 「평화각」은 중국인들의 결혼피로연장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인천석금(저자·高逸)」에 따르면 「공화춘」 등 대부분의 중국음식점이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했으나 이중 「의생성」은 광동요리를 전문으로 했다. 일본인 고사까(小坂)가 중구 용동에서 운영하던 「일화루」는 처음에는 중국요리로 시작해 나중에 서양식당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중국음식점들이 번창하면서 음식재료를 만들어 파는 업소들도 함께 성황을 이뤘다. 일부 화교들은 「당면」이나 「춘장」공장을 운영해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중국음식점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화교소학교에서 역사선생을 지낸 조내학씨(54)는 『많은 화교들이 중국음식점을 운영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 60년대말까지 화교들이 자유롭게 부동산을 거래하거나 공장을 설립할 수 없도록 제한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당시만 해도 화교들 사이에선 주방장을 천하고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겼다고 한다.
자금성의 孫사장은 어려운 가정살림 탓에 요리기술을 배우던 젊은 화교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고 회고한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선 자신은 물론 주방장이 먹을 양식까지 따로 준비해야 했으며 이불과 베게도 싸가지고 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孫사장은 『처음 요리를 배울 땐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 없는 불어터진 국수가락만을 먹으면서 요리를 배웠다』고 말했다.
6.25 이후 한동안 퇴락하던 중국음식점들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또 다시 호황을 맞게 된다.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마땅한 「외식 거리」를 찾지 못했던 서민들이 중국음식점을 자주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포동에는 공화춘의 명맥을 이은 「중화루」가 새단장을 하고 영업을 재개했다.
朴正熙 전 대통령의 영부인 故 陸영수여사도 이 곳을 자주 찾았을 정도. 또 신포시장입구에는 「은하장」이 있었으며 답동사거리에 「신성루」가 자리를 잡았다. 이후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곳이 지금의 「중화루」 옆에 위치한 「진흥각」이다. 해산물 등 신선한 재료와 독특한 맛으로 시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진흥각」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이면 발디딜 틈이 없을 만큼 호황을 누렸다. 현재 청관거리에는 1백70여가구에 5백여명의 화교들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자금성」, 「신신반점」, 「산동만두」, 「풍미」, 「대창반점」, 「상원」, 「중국성」, 「태화관」 등 10여개 중국음식점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상태다. 이처럼 갖가지 「음식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청관거리. 최근 중구가 이 곳 「차이나타운」 재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