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통학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7:12
「콩나물시루」같은 전철을 타고 통학을 했거나 지금 하고 있는 학생들에겐 통학의 낭만은 커녕 지겹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그러나 경인선 전철화 이전, 기차가 학생들의 「이동 독서실」 또는 이야기 꽃을 피우는 「이동 카페」였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내일의 꿈과 향학열을 싣고 다니던 기차통학에 얽힌 갖가지 낭만적인 이야기들은 지금도 인천인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경인선이 개통된 것은 1899년. 인천지역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 학교에 통학하기 시작한 것은 1915년께 부터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인천은 일본인 1만여명을 포함해 인구 6만~7만명의 도시였다. 인천의 초등학교라고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박문학교, 영화학교 등 한국인 학교와 2곳의 일본인 학교가 고작이었고 이들 학교에선 매년 약 2백명씩 4백여명의 남녀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었다. 중등학교론 일본인 전용의 인천남상업학교와 한국인만 다니던 인천북상업학교, 그리고 일본인 전용의 인천고등여학교가 있어 매년 1백50명 정도를 수용했다. 그래서 상급학교를 지원하는 한·일 남학생과 한국 여학생중 상당수는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수십년동안 기차통학이란 취학방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신태범박사(86)의 「인천 한세기」에 따르면 1920년대 초엔 배재통학생만 20여명으로 한 그룹을 이룰 정도였다. 이들은 인배회(仁培會)를 조직하고 전인천축구대회에 출전해 우승한 일도 있었다. 그 무렵 통학생 수는 한국 남녀학생 2백명, 일본학생 1백명 가량 됐다. 처음엔 남녀공석이었다가 나중엔 남학생은 앞칸, 여학생은 맨 뒤칸이란 불문율이 생겼고 남학생들은 학교별로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도 요즘과는 달리 비슷비슷했다. 남학생의 경우 각반을 차고 다니던 배재와 경성 중학생을 제외하곤 대개 거의 똑같은 학생복을 입어 모자로 식별했다. 여학생은 긴 머리를 따고 댕기마저 들였다. 또 저고리에 짧은 치마, 긴 양말에 구두를 신는 동일한 복장을 했기 때문에 저고리 앞에 달고 있는 학교 「배지」로 구별했다. 그러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만은 치마에 백선을 두르고 있었다. 교복이 좀 돋보였던 셈. 이어 30년대 부터는 여학생들도 양장 제복을 입게 된다.
경성중학교에 입학한 1925년부터 10년동안 기차통학을 했다는 신태범박사는 『당시 경성제대의 高裕燮씨(고고학), 연희전문의 葛弘基씨(전 공보실장), 법학전문의 趙鎭滿씨(전대법원장) 등의 사각모자가 유난히 눈에 띄어 우러러보면서 다녔던 생각이 난다』며 『겨울에는 여학생들이 검은 두루마기에 자주색 털실 목도리를 두르고 책보를 들고 있었는 데, 그 모습이 참으로 멋져 보였다』고 회상했다.
기차는 대개 오전 6시 부터 오후 10시 까지 하루에 18회를 운행했다. 거의 모든 통학생이 축현역(현 동인천)에서 타고 남대문역(1926년 현 서울역 청사가 준공되기 전의 구역)에서 내렸으며 통학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당시 통학생들은 요금혜택을 많이 받았다. 통학패스를 끊으면 1개월권이 2원, 3개월권 4원50전, 6개월권 6원이었다. 어른1회 요금이 55전이었으니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특혜를 줬는 지 알 수 있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기차이용객이 그리 많지 않고 차삯도 물가에 비해 비싼 편이어서 기차가 붐비는 일은 드물었다. 그리고 객차내 의자도 넓고 등받이가 높아서 학생들은 통학을 하며 편안하게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처럼 소요시간, 통학생 운임, 객차 구조 등이 인천_서울간 기차통학을 활성화하는 충분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인천석금」(저자·高逸)에서 저자는 『새벽밥을 든든히 먹고 점심 도시락까지 책보에 싸서 어두운 새벽길을 달음질해서 기차에 오르면 그날 일은 성공이다. 그래서 차시간에 늦지 않게 나가는 일에 익숙해야 했다.』며 당시 기차통학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또 『겨울철 컴컴할 때 첫차를 타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스팀과 밝은 전등이 학생들을 위로해 주었다. 또 봄날이 오면 교차되는 오류동에 만개한 벚꽃이 공부에 시달리던 뇌수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른 여름과 가을에는 축현역 연못가 서늘한 아카시아 숲에서 영시(英詩)를 암송하는 취미도 기차통학생이 아니면 맛볼 수 없었다.』며 기차통학을 당시 젊은이들의 「파라다이스」로 묘사했다.
이밖에 기차통학에 얽힌 이야기중엔 여러 「로맨스」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그중 진명여고보에 다니던 인천양조 崔炳斗사장의 외동딸 崔貞順씨가 뜻을 굽히지 않고 치전(齒專)학생이었던 林榮均씨와 로맨스의 열매를 맺은 이야기가 통학생들 사이에서 「신화」처럼 오랫동안 회자됐다. 아울러 「미스통학생」으로 유명했던 咸眞珠씨와 내리교회 목사의 자제인 洪恩均씨의 열렬한 로맨스도 한때 떠들썩했다. 이 처럼 통학생들의 꿈과 낭만을 싣고 달리던 경인선은 많은 인천인들 가슴에 지금도 「추억의 기적소리」로 남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