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이야기

인천의 명물, 냉면

by 형과니 2023. 3. 8.

인천의 명물, 냉면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2007-01-12 12:44:45

 

 

인천의 명물, 냉면

 

 

『인천』하면 자장면을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오히려 더 이름났던 인천의 대표적 음식은 냉면이었다. 서울 등지에서 냉면을 먹으려고 인천으로 「냉면여행」을 왔을 정도였다. 여기에다 서울 명동이나 종로까지 자전거로 냉면배달을 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마저 전해지고 있으니, 인천의 냉면이 얼마나 유명했는 지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인천에 냉면거리가 따로 형성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중구 답동 성당에서 용동 마루턱을 지나 배다리 너머까지 유명한 냉면집 몇 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이 곳에서 이들 냉면집의 자취를 찾아볼 순 없지만 한때 전국에 그 이름을 날렸던 것 만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천에 냉면집이 언제부터 생겨났는 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대략 개항(1883년)을 하고 10여년 지나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들면서 부터라는 게 게 공통된 얘기. 개항 이후 갖가지 외국문물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면서 인천의 인구는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각국 조계설정에 따른 외국인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찾거나 한몫 잡으려는 이들로 북적였던 것이다. 이중엔 항구의 화물작업이나 도로공사 등을 하는 막일꾼들(모군꾼)이 많았다. 그 무렵 인천엔 충청도·경상도·전라도·이북 사투리를 쓰는 이들의 거주지가 따로 생겼을 정도였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인천으로 유입되면서 시내 곳곳엔 각종 음식점들이 속속 선을 보이기도 했다. 근대식 외식업에선 인천이 오히려 서울보다 앞서 있었다는 얘기마저 있다. 서울에서 대중음식점이 보급되기 시작한 게 1925년 조선박람회개최 이후였다는 내용이 그 근거. 이들 여러 종류의 음식점중에서 으뜸으로 친 게 바로 냉면집이었다.

 

냉면집에선 국수를 나무통과 긴 방아자루 등에 걸쳐 놓고 뽑아냈다. 냉면의 주원료인 메밀은 잎이 파랗고 꽃이 희며 줄기가 붉고 열매가 검으며 뿌리가 노랗다. 그래서 냉면을 청·백·홍·흑·황 등 오색을 갖춘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 하여 옛 사람들은 음식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오래전 부터 냉면의 원조는 평양으로 알려졌지만 인천의 냉면을 따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냉면집의 빨간 깃발은 그 당시 부터 생겨난 풍경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냉면을 찾자 눈에 띄는 깃발을 음식점 앞에 내걸기 시작했다는 것.

 

그 무렵 인천의 냉면집 중에선 지금의 중구 용동 마루턱에 있던 평양관(平壤館)이 원조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 자리에 있던 경인면옥과 금곡동 시장 입구의 복영루 등도 유명했다. 답동 성당옆에 있던 사정옥(寺町屋)엔 일본인들이 주로 찾았다. 인근에 인천최초의 극장 표관(瓢館)이 위치해 「활동사진」이 끝나는 시간이면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1920년대말 인천항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는 洪龍秀씨(89·인천시 남동구 구월동)는 『부둣가에서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먹었던 냉면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며 『그 때 냉면 맛은 정말 최고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당시 중국요리와 냉면맛을 즐기기 위해 서울 등 타지에서 인천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 때 냉면집엔 주문도 꽤 많았다. 서울 명동에 있는 주식취인시장에서도 장거리 전화를 걸어 인천냉면을 주문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특히 미두취인소 직원들은 한꺼번에 20~30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주문을 받으면 배달꾼이 냉면그릇을 얹은 긴 목판을 어깨에 건 채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했다. 마치 서커스를 하듯 달리는 배달꾼들이 나타나면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진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오늘날 중국음식을 나르는 「철가방」의 원조격인 셈이다.

 

향토언론인 故 高逸선생이 지은 「인천석금」이란 책에도 그런 재미있는 얘기들이 실려 있다. 『사정옥과 평양관 등에는 손님보다 오히려 주문이 많았다. 특히 서울 등 멀리서 주문하면 자전거에 냉면목판을 싣고 배달한 시절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냉면집간 경쟁으로 마치 배달원들이 자전거경주대회를 여는 듯 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어떤 때는 기차편을 이용한 대량주문배달도 함께 이뤄졌다.』

 
갖은 고기 양념을 넣어서 만든 냉면 값은 처음엔 5전이었으나 차츰 인기를 끌면서 10전, 15전, 20전까지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인천 한세기」의 저자 愼兌範박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 그릇에 15전 할 때 처음으로 냉면을 먹었는 데, 당시 인천냉면이 서울냉면보다 맛이 좋다고 해서 냉면을 먹으려고 일부러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서울 한량들이 경인선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냉면여행」을 올 정도였으니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 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천에 그렇게 유명한 냉면집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값싸고 양 많기로 널리 알려진 동구 화평동 냉면골목에서 그나마 옛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경인일보 - 서 진호기자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인선 협궤열차  (0) 2023.03.08
기차통학  (0) 2023.03.08
인천의 박물관  (0) 2023.03.08
요리집과 권번  (0) 2023.03.08
인천의 성냥공장  (0)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