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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인천의 성냥공장

by 형과니 2023. 3. 8.

인천의 성냥공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1:35


인천의 성냥공장

 

군 복무를 한 대한민국 남자치고 아마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노랫말을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가사 내용이 저속해 대놓고 부르기는 좀 민망스러운 노래. 하지만 그래도 비속어가 통용(?)되는 군대라는 특수집단 내에선 6·25 이후 군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이었다. 군인들은 「우스개 말」이 담긴 이 노래를 부르며 피곤한 심신을 잠시 달래기도 했다. 

 

실제로 성냥제조업은 반세기 이상 인천 공업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만큼 성냥공장이 많았다는 얘기. 성냥 제조업의 시발점이자 본거지가 바로 인천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세워진 곳이 어딘 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약간씩 엇갈린다. 그러나 향토사 연구가들은 『인천이 거의 확실하다』고 강조한다. 

 

趙우성씨(52·광성고 교사)에 따르면 1923년 발행된 「인천부사」에 本田千代松이란 일본인이 1885년경에 서울 양화진에 성냥공장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여기에다 「인천부사」가 쓰이기 훨씬 이전인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책에서 이미 인천의 성냥공장을 언급했다. 趙 씨는 『따라서 인천에 성냥공장이 최초로 세워졌다는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고 말했다. 

 

성냥공장이 인천에서 성행하게 된 배경은 멀리 구한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 후 3년이 지난 1886년께 부터 인천에는 외국인들의 주도로 성냥공장들이 세워졌다. 이 들 성냥공장에서 생산된 제품 가운데 약간은 중국에 까지 수출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유는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 일본제 성냥은 특히 한국의 남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소비됐다고 한다. 1900년대 초에는 「브라이어 앤 메이」란 고가의 영국제 성냥이 국내에 반입되기도 했으나 품질이 낮은 데다 가격이 싼 일제 성냥에 밀려 자취를 감춘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 1917년에는 인천부 금곡리(현재의 금곡동 33번지 일대) 2천여평의 대지위에 「조선 인촌(성냥) 주식회사」가 들어섰다. 「우록 표」(羽鹿票), 「쌍원 표」(雙猿票)등의 제품을 생산한 이 회사는 남녀 직공 5백여 명이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만들어 낸 명실공히 국내 최대의 성냥공장이었다. 

 

당시 국내 성냥소비량의 20%를 점유할 정도로 규모가 대단해 지방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 무렵엔 기계화가 잘 이뤄지지 않아 성냥개비에 인을 부치거나 성냥개비를 성냥에 넣는 작업을 전부 사람의 손으로 했다. 성냥공장에선 주로 10대 소녀들이 일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돈을 모아 공부를 하려는 꿈에 부풀어 유황냄새 찌든 공장 안에서 성냥개비와 씨름하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어릴 적 금곡동 성냥공장 인근에 살았다는 張홍목씨(79)는 『인천 공립 보통학교(지금의 창영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가 파하고 나면 성냥공장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허름한 목조 건물 안에선 주로 여자 직공들이 성냥갑에 성냥을 넣는 작업을 했는 데, 기계적인 작업을 반복해서인 지 손으로 성냥을 집어 성냥갑에 넣는 솜씨가 귀신같았다.』고 회고했다. 

 

또 성냥공장 외에 금곡동과 송림동 지역의 5백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들어 공장에 납품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성냥갑 만드는 일이 인천지역 최고의 가내수공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성냥갑을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성냥갑을 접은 뒤 집에서 만든 밀가루 풀로 성냥갑의 안쪽에 까지 종이를 붙이는 등 잔손이 많이 갔다는 것이다. 어떤 집은 온 식구가 성냥갑에 매달려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당시 금곡동 일대 공터나 도로변엔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 온통 뒤덮이는 등 동네 전체가 성냥공장을 방불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 왜 유독 인천에서 성냥제조업이 번창할 수 있었을 까? 여기엔 지리적·사회적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당시 인천에는 항구도시의 특성상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다. 또 압록강 일대 오지에서 벌목한 나무들이 신의주를 거쳐 인천항을 통해 반입되는 등 성냥의 재료를 구하는 것도 수월했다.

 

「인천한 세기」의 저자 愼태범 박사(85)는 『그밖에 당시 지역여건을 서울과 비교할 때 서울에는 성냥공장을 세울만한 부지가 없었고 전력도 인천보다 부족했다』며 『인천은 성냥공장이 들어서기에 적지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금곡동 7통 고지대엔 원활한 인천지역 공장들의 가동을 위해 인천 최초의 변전소 시설까지 들어서는 등 전력사정이 서울보다 훨씬 나았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이나 대구 등지에 세웠던 성냥공장들이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한 채 얼마 안가 문을 닫은 것도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그런가 하면 성냥공장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1930년대 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인천 노동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성냥공장 직공들의 파업이다.당시 노동쟁의 땐 임금인상뿐 아니라 임금 인하에 대한 반대 투쟁도 극렬했다고 한다. 그 무렵의 고용주, 특히 일본인 고용주들이 갖고 있던 노동자 임금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 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더구나 일본인 감독에게 여성노동자들이 비인격적인 모욕을 받는 일이 잦았던 만큼 여직공이 많은 성냥공장으로선 여성노동자들의 인격적 해방을 위한 의식 향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성냥공장은 이러한 노동쟁의의 진통을 거쳐 해방을 맞으며 새로운 체제로 탈바꿈한다.인천의 성냥공장은 성냥 제조업의 시발점이자 본거지라는 연대기적 의의 말고도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쌀의 일본 유출이 많았던 인천항 주위엔 정미소들이 많았고, 이들 정미소 노동자와 인천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인천에는 정미소 못지않게 성냥공장도 많았던 만큼 성냥공장에서의 파업도 상당했다. 정미소 다음으로 노동쟁의가 극렬했다는 것이다. 

 

「인천시사」 등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성냥공장의 여직공들은 1만개의 성냥개비를 붙여야 60전을 손에 쥘 수 있었으며 노동시간은 하루 평균 13시간에 달했다. 그런데 일본인 경영주들은 이런 어린 노동자의 임금마저도 인하하려 했고, 이를 도화선으로 인천지역 각 성냥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따랐다.

 

성냥공장에서 벌어진 첫번째 파업은 1926년 4월에 발생한 금곡리(현재 금곡동) 「조선 인촌 주식회사」에서의 파업으로 「임금 인하에 반대」가 파업의 목적이었다. 파업이 한 달 동안 장기화하면서 경찰이 개입하기도 했으나 고용주가 결국 노동자의 요구사항을 승인함으로써 해결됐다. 이어 수차례의 파업이 잇따랐으나 역시 노동자의 승리로 끝났다. 노동자들은 1932년 이후에도 임금인상과 일본인 감독 배척을 요구조건으로 파업을 다시 일으켰으나 노동자가 경찰에 검거되는 등 경찰의 탄압과 장기간의 파업으로 인한 생계에 위협을 이겨내지 못해 요구조건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성냥공장 파업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성노동자가 많았던 만큼 단순한 임금투쟁 외에 일본인 감독에 대한 항의파업이 많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제 식민지하에서 일본인 감독들은 어린 여직공들에게 수시로 인간적인 모욕을 주는 일이 허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趙우성씨(52·광성고교사) 등 향토사 연구가들은 『인천 노동운동사는 물론 여성 권리의식의 뿌리를 찾는 측면에서 성냥공장의 파업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우여곡절의 세월을 지나 성냥공장은 해방을 맞으며 한국인 운영체제로 탈바꿈한다. 愼태범박사(84·인천 한 세기 저자)에 따르면 일제가 물러난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공장들은 미군정 산하 「적산 관리처」의 관리 아래 운영권이나 재산권을 한국인에게 넘겼는데 비교적 대형공장은 서울 사람들이 장악하고 소규모 업체만 인천사람들이 접수했다. 

 

愼박사는 『해방후 어수선한 틈을 타 서울 사람들이 재빨리 미군정에 손을 써 성냥공장을 접수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인천사람들은 소규모 영세업체들만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지포(Zippo) 라이터가 유행했고 미군이 물러간 뒤에는 국내에서 생산된 유사제품이 한 때 범람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생활필수품이었던 「성냥」의 종말이 사실상 예고됐다. 특히 전자점화장치의 개발로 1회용 가스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인천의 성냥공장은 60년대 들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

 

그래도 성냥은 한국전쟁 이후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을 당시 전쟁피해자들을 보듬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동구 금곡동 주민 郭정자씨(여·57)는 『한국전쟁 이후 금곡동 지역 각 가정에선 가족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오갈 데 없는 사람들까지 가세해 성냥갑 만드는 일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한편 성냥공장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인천에 세워진 공장중 하나로 담배공장을 빼놓을 수 없다. 오래전부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연초를 재배하긴 했지만 개항 이래 권련과 시거 등 근대적인 외국제 연초들이 대량으로 수입, 판매됐다. 인천에는 이미 1887년에 외국제 연초를 판매하는 상점이 있었다. 흡연자도 매년 늘어나 1903년 외국제 연초의 수입액이 42만 원이던 것이 1904년에는 1백14만 원에 달하는 등 수요가 폭증하기도 했다.

 

「인천시 중구향토사」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처음의 담배공장은 미국과 영국이 합작으로 설립한 「英美卷煙회사(The British_American Tabaco Company)」로 이 회사는 1899년(광무 3년) 말부터 담배를 생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에선 이 회사가 「上海 漢口에 공장을 두고 인천항을 통해 「히어로(HERO)」라는 상표를 가진 권련을 수입, 판매하다 1908년 3월에는 인천에 중국 지계 안에 분공장을 설치하고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인천시사)고 적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또 인천시사에 따르면 1900년에 이미 안드레 필립이라는 희랍인이 영국인과 합자해 「東洋煙草회사」를 설립하고 그해 5월부터 생산을 개시했는데 홍수처럼 수입되는 외국제 담배와 경쟁할 수 없어 영업을 중지했고 설상가상으로 화재로 공장 전부를 소실당한 채 폐업했다고 전한다.

 

어쨋든 우리나라 최초의 담배회사로 알려진 「英美卷煙회사」의 인천 분공장엔 1백여 명의 한국인 종업원이 종사했으며 생산액은 7천2백만 원에 달하는 등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료는 한국의 대구나 밀양산이었는데 주요 도시마다 특약점을 두고 제품을 판매했으며 재고품이 없을 정도로 잘 팔렸다고 한다. 당시 이 회사는 일본 정부가 직영하는 관제품과 일본 상인들이 규합해 세운 「東亞煙草주식회사」 등과 경쟁을 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돌에 새긴 회사명 등 공장의 흔적이 미미하게 남아 있었다는 게 향토사 연구가들의 전언이나 현재로선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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