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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만석동 똥마당

by 형과니 2023. 3. 8.

만석동 똥마당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0:38


인천시 동구 만석동 47 일원. 인천사람들은 예전에 이 곳을 「똥마당」이라 불렀다. 주민들에겐 별로 달갑지 않았던 동네이름. 지금은 고가도로가 생기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날 풍경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똥마당」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진하게 묻어났던 삶의 터전으로 아직도 인천인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이북에서 피난내려 온 사람들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이들은 어느덧 군락을 형성했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갔다.

피난민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주거지. 그래서 이들은 도로공사에 사용하는 콜타르를 기름종이에 입힌 자재로 지붕을 올려 4~5평의 판자집을 지었다. 이런 형태의 판자집 4백여채가 다닥다닥 들어서면서 이곳은 송현동 수도국산에 이어 인천에서 피난민들의 정착지로 자리잡았다.

이 「꼬방동네」 한 복판에는 공동화장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만큼 위생적일 리 없었다. 「똥마당」이란 동네이름은 바로 공동화장실에서 비롯됐다. 아울러 동네 인근에는 인천의 대표적 향토기업인 「대성목재」가 있었는 데, 이 회사와 주민들간 관계는 여러가지 면에서 각별했다. 당시 취직을 하기 위해 인천을 찾은 사람들 사이에선 『대성목재밖에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 만큼 대성목재는 상당히 큰 규모의 회사였다. 이 동네 주민중 상당수가 대성목재에 다녔을 정도.

이 회사는 인근 앞바다에 저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는 데, 저목장에는 지름 1.5~2m, 길이 15~20m 가량의 수입원목들을 띄워 놓고 있었다. 전쟁통에 모든 것을 잃고 고통을 겪던 피난민들에게 이 저목장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였다.

주민들은 저목장에서 나무껍질을 떼어 내 햇빛에 말린 뒤 이를 일반 가정집에 내다팔거나 연료로 사용했다. 그 무렵 많은 가정에서 이 곳 나무껍질을 공급받아 난방연료나 취사용으로 썼다고 한다. 회사로서도 원목의 기초가공과정을 줄일 수 있어 주민들을 제재하지 않았다.

나무껍질을 떼내는 일이 중요한 생계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나무껍질 분리 도구도 변천했다. 주민들은 처음엔 못을 뺄 때 사용하는 「빠루」를 이용, 나무껍질을 떼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빠루」의 손잡이 끝 부분을 납작하게 펴 날을 세운 「획기적인」 도구를 만들어냈다. 이 「변형빠루」는 나무껍질을 떼내는 데 그만이었으며, 나중에는 인근 철물점에 이 변형빠루가 등장하기도 했다.

평안도에서 피난나와 똥마당 인근에서 살았다는 정창희씨(여·69)는 『동네 집집마다 나무껍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어떤 집은 부업차원을 넘어 생계를 위해 나무껍질 떼내는 일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나무껍질을 태우면 군불이 오래 가는 특성이 있어 인기를 끌었다.』고 회고했다.

나무껍질 떼내는 일이 주민들 사이에서 생업으로 자리잡자 경쟁 또한 치열했다. 그 무렵만 해도 인천항 도크가 완전히 조성되지 않아 원목을 실은 대형선박이 몇 ㎞ 떨어진 외항에 원목을 풀어놓으면 또 다른 배가 원목을 견인하는 식으로 원목을 반입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외항에까지 배를 타고 나가 원목을 실은 배 위에서 나무껍질을 떼내기도 했다.

하지만 대성목재의 저목장은 이처럼 주민들의 생계에 큰 보탬을 주는 장소였지만 인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아이들이 저목장에 띄워놓은 통나무 위에서 놀거나 인근 바다에서 수영을 하곤 했는 데, 해마다 1~2명의 아이가 바다에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수영을 하고 놀았다는 김모씨(40)는 『바다에 빠지면 원목아래로 빨려 들어가 통나무와 수압에 못이겨 숨을 거두는 끔찍한 일이 종종 발생했다』며 『그런 일이 한번 일어나면 아이들은 한동안 바다를 찾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이 동네엔 판자집이 밀집해 있었던 만큼 늘 대형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방서 주관으로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소방훈련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 주민들의 소방의식이 높아 불이 나도 대형화재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 곳 주민들의 삶 중에는 도시가스가 보편화한 현재로선 생소하기만 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민들은 종종 하인천역에 정차해 있는 석탄열차 인근에서 석탄부스러기를 주워오곤 했다. 구공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부 가정에선 석탄을 찧은 뒤 간이 구공탄 틀을 이용, 직접 구공탄을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다. 석탄부스러기 물량이 한정돼 있었던 탓에 「과감한」 주민들은 열차에서 구공탄을 훔치다 적발되기도 했으나 삶이 버거웠던 시절이었기에 파출소에서도 대개 그냥 훈방조치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똥마당」은 80년대 중반부터 3차에 걸쳐 시영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대성목재도 월미도로 이전했고 이제는 고가도로가 「똥마당」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사람사는 내음이 가득했던 똥마당. 수세식 변기에 익숙한 우리네 삶의 뒤안길에는 이처럼 질곡의 세월을 대변하는 「똥마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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