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허대지와한나루
옥련동 송도 전화국에서 옹암으로 가는 길 오른 쪽에 능허대 공원이 있다. 이 곳에는 1600여년 전 중국과 교역하기 위하여 해상교통로를 개척한 백제인의 진취적 기상이 서려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자기나라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남쪽 국경을 확장하기 위하여 백제로 쳐들어왔다. 두차례의 전투에서 백제는 고구려 군사를 물리쳤다. 이제 백제의 근초고왕은 태자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쳐들어갔다. 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달리 백제는 중국으로 갈 육로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가 통로를 빌려줄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백제는 중국으로 가는 해상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항로가 미추홀(인천)의 한나루에서 출발하여 중국 산둥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등주항로이다. 등주항로는 직선코스인데다 북쪽으로는 발해만이 놓여있어 비교적 안전한 항로였다. 그러나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중국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걸고 가야할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능허대는 청량산 산줄기가 한나루를 향하여 달려오다 멈춘 듯 생긴 봉우리를 말한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문학산의 사모지고개를 거쳐 능허대에 도착한 후 쾌청한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머물다가 배를 탔다. 따라서 능허대는 사신들을 배웅하는 장소였던 셈이다.
이 능허대에 가슴아픈 전설 하나가 전해져 온다.
옛날 백제사신 하나가 이 곳에 와서 중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게 되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배 떠나는 날은 계속 연기되고 그러다 사신은 이 곳에 있던 기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날 날씨가 좋아져 사신을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신이 탄 배가 먼 바다로 가자 기녀는 석별의 정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이 기녀가 떨어진 바위를 기녀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근초고왕 27년부터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개로왕 21년(475)까지 백제는 능허대, 한나루를 통하여 중국과 왕래하였다. 백제를 물리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굳이 해상교통로를 이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능허대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1930년대, 고유섭은 '능허대는 인천의 해안선 남쪽에서 십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모래섬으로 이 곳에서 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는 바다와 달라 막힘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능허대 주변은 모두 매립되어 바다이던 서쪽으로는 해안도로가 달리고 있고 동쪽 포구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예전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능허대에 있는 정자에 올라가보면 예전같지는 않겠지만 인천에서는 드물게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지금 있는 공원은 1988년 당시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전에 없던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만들어 놓아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능허대지와한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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