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중구지역 근대문화유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6-12-26 02:14:09
인천중구지역 근대문화유산
보전대상지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1> 역사적 배경
인천개항의 역사
1882년 5월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은 구한말 개화의 선구적 개척지로 정치, 외교,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으며, 1883년 한국 최초로 외국상사가 진출하여 외국상관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확산 보급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곳이다.
또한 육해상 교통이 발달되어 수도권의 관문으로서 1897년 3월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가 부설되고, 1969년 7월,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1974년 8월 한국 최초의 전철이 개통된 역사의 선두를 기록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인천의 근대건축 자료집, 2001, 인천광역시>
특히 인천 중구지역 일대는 1876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되었지만 일본, 청국과 서구 각국의 조계(거류지)가 형성됐던 개국(開國)의 현장이다. 그 계기나 시대적 배경이 좋지 않았지만, 서양의 문물이 이 땅에 처음 발을 딛는 장소였다는 것만으로도 그 역사적 의의 찾을 수 있고, 보전의 필요는 설명이 될 수가 있다.
인천의 번영과 쇠락의 역사
인천 중구 지역은 국내최초로 근대적인 도시계획이 시행된 곳으로 답동성당, 인천우체국 등 근대건축물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 등 근대문화유산이 밀집해 있다.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서구문물이 급격히 유입됐고 각국의 조계지에는 특색있는 건축물들이 다양하게 들어섰다. 구한말까지 중구지역은 외국과의 수교 및 조약체결장소였으며 외국 영사관들이 밀집해 있는 외교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현재의 중구청사는 일본영사관이였고, 올림푸스 호텔은 영국영사관이었다 .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국내 수탈을 위한 철도와 항만이 정비되고 공출 물자들이 집결되는 등 물류중심지로 부상했다. 해방이후에도 중구지역은 한동안 인천의 중심지로 가장 번화한 거리였으나 인천광역시로의 승격을 전후로 인천시내 여타지역의 개발과 인천시청을 비롯한 관공서 이전등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훼손 상황과 보존을 위한 활동
그동안 개발을 원하던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나마 국내 최대규모의 근대문화유산지면서, 주변 경관이 비교적 덜 훼손 된 것은 인천 중구가 응봉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고도제한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개발의 손길은 피할 수 없어 지은지 100년이 넘은 중화(中華)교회가 철거되고 곳곳에 어울리지 않는 빌라와 러브호텔이 들어서는 등 옛 건물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에 다급해진 인천시와 시민단체가 비상조치에 착수하여 시는 일본, 청국조계지 등이 있는 관동, 중앙동 등 이 일대 14만2000평의 모든 건축물을 강력히 규제하는 도시계획을 마련하였다. 2000년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최근 작성한 ‘개항기 근대건축물 밀집지 역 지구단위계획’은 이 일대 모든 건물의 높이, 디자인, 색깔까지 보존대상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도록 가이드 라인을 만들었다. 창틀과 발코니, 처마까지 시가 정한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한다. 러브호텔 등의 주변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용도나 모양의 건물은 건축허가가 날 수 없다.
보존의 필요성
지자체가 근대문화유산 보전의 필요성을 인식함으로써 인천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첫 단추가 끼워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축전문가들과 시민단체, 자치단체가 합심해 최소한 10년 정도는 돌봐야 근대와 현대가 조화된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현실 앞에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대문화유산의 훼손까지는 막아내기 힘들 것이다.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은 외세에 의해 세워졌거나, 설립 연대가 오래되지 않아 일반인들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유산에 대한 좁은 이해와 개발논리에 밀려 이들을 보존하지 못할 경우 근대의 문화적 유산들은 영원히 소실될 것이다.
인천중구일대에는 100년이 넘는 건축물이 4채, 1950년 이전에 지은 건물만 291채나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근대문화유산 보전에 뜻을 같이 한다면 신라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와는 조금은 다른 경우라 해도 근대역사의 도시로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2> 인천의 지정문화재(근대건축물)
<목록>
[국가지정문화재]
◎ 답동 성당(1897) - 국가지정 유형문화재 사적 제 287호
[시지정문화재]
◎ 舊 일본 제1은행(1897) - 시지정 유형문화재 사적 제 7호
◎ 인천 우체국(1923) - 시지정 유형 문화재 제 8호(1982. 3. 2)
◎ 舊 인천 제물포 구락부(1901. 6. 22) - 유형문화재 제 17호
◎ 舊 일본 58은행(1892) - 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19호(1993. 7. 6)
◎ 홍예문(1908) - 유형문화재 제 49호(2002. 12. 23)
◎ 舊 일본 18은행(1890)- 유형문화재 제 49호(2002. 12. 23)
◎ 성공회성당(1956) - 유형문화재 제51호
[기념물]
◎ 양주성 금속비(1878, 고종 15년) - 시 기념물 제13호
◎ 청일조계지 경계계단(1884) - 기념물 제 51호(2002. 12. 23)
[민속자료]
◎ 용동큰우물(조선시대) - 민속자료 제 2호(1996. 06. 12)
[문화재 자료]
◎ 조병수 가옥(1890) - 문화재 자료 제 6호(1997. 07. 14)
[국가지정문화재]
답동 성당(1897)-국가지정 유형문화재 사적 제 287호(1981. 9.25)
파리 외방전 교회 소속의 죠셉 비리엠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면서 고딕양식의 성당 건립 이후, 드누신부가 증가하는 신도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성당 개축(본래 구성당의 바깥으로만 증축) 본래 마루바닥에 의자 없이 미사를 드렸지만 1973년 인조대리석 바닥으로 개조하여 의자를 비치하였다.
[시지정문화재]
1. 舊 일본 제1은행(1897)-시지정 유형문화재 사적 제 7호(1982. 3. 2)
현재사용용도 : 중구청 개발과
건 물 면 적 : 약 200평
대 지 면 적 : 약 120평
일본금융기관으로 인천 금융기관의 효시. 목조 2층 건물을 짓고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으로 업무를 시작하다가 기반이 굳어지면서 현재의 석조 사옥을 신축.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변경(1911)되었다가 해방 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개편. 이후 조달청 인천지점(1980), 인천지방법원 등기소(1996), 폐쇄된 채 방치(1997), 상설의류매장 및 인천 문화 발전 연구소(1998)를 거쳐 2000년 8월 이후 건물보수 준공 공사를 거쳐 현재 중구청 소관 부서로 이용중이다.
2. 인천 우체국(1923)-시지정 유형 문화재 제 8호(1982. 3. 2)
개항당시(1884) 일본영사관 건물내에 병설되었던 우편사무실이 인접지에 신축한 2층 목조 건물(1896)로 이전 인천우체국사를 합동 흡수한 이후 1923년 현청사가 신축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전하여 540평 규모의 석재 콘크리트 건물로 슬라브 지붕이 한국 전쟁때 포화로 파괴된 이후 이를 슬레이트로 보수하여 오늘날까지 우편 업무를 보다가
3. 舊 인천 제물포 구락부(1901. 6. 22)-유형문화재 제 17호(1993. 7. 6)
인천에 거주하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 각국 지계 내의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현재는 인천문화원에서 활용(구락부란 club의 일본식 발음)하고 있다.
4.舊 일본 58은행(1892)-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19호(1993. 7. 6)
현재사용용도 : 한국요식업조합
건 물 면 적 : 약 1, 2층 약 87평
대 지 면 적 : 약 60평
일본 오사카에 본점이 있는 일본 제 58은행이 인천지계에 설치한 인천지점으로서 1892년 7월에 완공되어 문을 열었다. 한서, 동일, 호남 3개 은행이 합병 조흥은행을 발족(1943), 한때 대한적십자 인천지점으로 사용했고 현재 인천시 요식업 조합으로 사용중이다.
5. 홍예문(1908)- 유형문화재 제 49호(2002. 12. 23)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다. 일본인이 자국이 조계를 확장하기 위한 축조물이지만, 현재 인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인천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일본의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6. 舊 일본 18은행(1890)- 유형문화재 제50호
현재사용용도 : 빈 건물인 상태
건 물 면 적 : 약 68평
대 지 면 적 : 약 100평
일본이 한국의 금융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계획되어 세워진 은행. 18은행의 업무가 언제까지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1954년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한국흥업은행으로 사용된 이후 1992년까지 까페로 사용되다가 현재 중고가구 도매상으로 사용. 역사적 건축적 가치는 이미 시지정 문화재로 지정 받은 58은행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7. 성공회성당(1956)- 유형문화재 제51호
영국 성공회의 의료사업과 선교의 시작이며, 성공회대학의 시작의 효시가 된다. 건물은 1956년에 다시 재건하였으나 1890년 당시의 건물 그대로 잘 복원되어 있다.
[기념물]
1. 양주성 금속비(1878, 고종 15년)-시 기념물 제13호 (1993. 07. 06)
고종 12년 8월25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영종진을 포격 함락되자 그해 8월 26일 인천부를 방어영으로 승격시키고 강화 유수부에 예속되어 있던 영종을 인천 방어영에 예속시켜 그해 10월 2일 홍문관 제학이던 양주성을 영종 첨절제사로 임명하였으며 영종 첨절제사로 부임한 양주성이 재임 기간 중 새로운 영종 방어영을 완성시키고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며 군비확충 강화에 주력하는 등 영종 방어에 기여한 공적과 주민들의 생활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선정을 기념하고자 주민들이 정성(놋그릇)을 모아 세운 공적비로서 당초에는 곤돌고개마루(운남동 지석묘가 있는곳)에 있었던 것을 주민들이 동민회관 옆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2. 청일조계지 경계계단(1884)-기념물 제 51호(2002. 12. 23)
이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에 청국 조계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는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자유공원 서남쪽 가파른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던 곳이기도 함. 인천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언덕형 계단과 돌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속자료]
용동큰우물(조선시대)-민속자료 제 2호(1996. 06. 12)
이 우물은 제물포구를 기점으로 한 인천 개항(1883)과 함께 현재와 같은 우물로 만들어졌다. 당초에는 자연 연못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상수도 보급 이전까지 대다수 인천시민의 생활용수와 식수원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우물 내부는 자연석과 가공된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들었으며, 지상에 노출된 윗부분은 원형의 콘크리트 관으로 마감하였다. 또한 우물을 보호하기 위한 한식 기와지붕의 육각형 정자는 1967년 건립하였으며, 현판 글씨는 인천출신의 유명 서예가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의 작품이다. 용동 큰 우물은 해방 후까지도 수도사정이 좋지 않을 때 시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유명한 우물이다.
[문화재 자료]
조병수 가옥(1890)- 문화재 자료 제 6호(1997. 07. 14)
서해 도서에 있는 중방으로 된 전형적인 중류주택이다. "ㄱ"자형의 대문채와 안채 두 건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에 의해 변이 끊어진 "ㅁ"자형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좁은 툇마루를 설치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2칸의 안방, 동쪽에 한칸의 건너방을 배치하고 그 앞에 하단 높은 툇마루를 놓았고 뒤에는 퇴를 내어 벽장으로 만들었다. 안방 앞에는 정측이 모두 2칸이 넓은 부엌을 달았으며 안방쪽 한칸의 부엌 천장을 낮추어 안방에서 사용하는 다락방으로 꾸몄다. 이와 같은 구성은 전형적인 중부형 주거로써 경기?충청지방에 많은 주거형식이다. 이 주택 건물은 비교적 큰 양재를 사용하여 정교로운 가공으로 만들어 졌으나, 문를 비롯한 졸렬한 후보재가 많고 현재는 매우 퇴락한 상태이다. 건립연대는 이미 100년이 넘어 보수 복원이 필요하다.
3>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문화유산
<목록>
◎ 대흥공사(1933)
◎ 해안 천주교 교육관(1939)
◎ 선린동 주택1(1939)
◎ 선린동 주택2(1947)
◎ 공화춘(1948)
◎ 대한통운 창고(1948)
1. 대흥공사(1933)
현재사용용도 : 무역회사(대흥공사)
건 물 면 적 : 약 119평
대 지 면 적 : 약 120평
1930년대에 일본 조계지 내에 지어진 사무용 건물로 비교적 규모가 크다. 현재에도 항만업 관계의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건물로 1930년대 타일 및 철재 개구부, 목재 창호, 조명기구 등의 재료 및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높은 층고로 내부 공간 또한 여유있게 설계되어 있다. 향후 근대건축의 보전 및 활용수법을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2. 해안 천주교 교육관(1939)
현재사용용도 : 천주교재단 강당 및 교육관
건 물 면 적 : 총 2층 약 95평
대 지 면 적 : 약 50평
1939년에 청조계지내에 세워진 중국인 주택으로 1995년에 천주교에서 화교에게 구입하여 교육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중국인 사합원 주택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건물로, 내부 상태나 각 부위의 디테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3. 선린동 주택1(1939)
현재사용용도 : 화교 주택으로 사용중
건 물 면 적 : 총 2층 약 68평
대 지 면 적 : 약50평
1939년대의 중국인 주상복합 건물로서 청조계지에 건설되어 현재에도 화교인인 거주. 1930년대의 청조계지에 형성된 중국의 사합원(四合院,'ㅁ'자 구조)주택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2층 발코니 형태 및 창호 등의 재료, 형태 등이 특징적이다. 현재사용용도: 화교 주택으로 사용중
4. 선린동 주택2(1947)
현재사용용도 : 개인 소유로 방치되어 있음
건 물 면 적 : 약 60평
대 지 면 적 : 약 100평
1947년 건설된 중국인 소형주택이다. 이 지역은 청국 조계지로서 중국인들이 상업 및 주거를 목적으로 대지를 구입하여 조적 또는 목조의 주상복합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사용용도: 개인소유로 방치되어 있음
5. 공화춘(1948)
현재사용용도 : 비어 있는 상태
건 물 면 적 : 총 2층 약 130평
대 지 면 적 : 약 70평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건물 관리대장상에는 1948년으로 되어 있다. 청조계지내에 지어진 본 건물은 청요리의 대표적인 음식점으로 舊 대불호텔의 중화루와 그 궤를 같이하는 유명한 곳으로 현재 몇 채 남지 않은 청조계지 내의 청요리집이다. 자장면과 청요리의 발상지로서, 건물의 형태, 재료상의 가치가 많은 건물이다.
6. 대한통운 창고(1948)
현재사용용도 : 기계등의 공장 또는 물류 창고/인천세관
건 물 면 적 : 약 1,500평 총 10개동
대 지 면 적 : 약 4,000평
1948년에 지어진 본 건물은 현재는 대한통운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사용용도: 기계등의 공장 또는 물류 창고/인천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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