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극장들, 인천시민회관에 얽힌 추억
仁川愛/인천이야기
2006-12-26 01:42:43
사라진 극장들, 인천시민회관에 얽힌 추억
이 희 환(인하대 국문과 강사, 학산문화원 기획위원)
‘극장’이라는 공간
농본적 질서 속에서 노동의 연장에서 잉태된 전통연희는 열린 공간인 마당을 무대로 펼쳐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우리는 고대 로마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콜로세움(colosseum) 원형극장을 쉽게 연상하게 되지만, 이 원형의 거대한 야외건축물은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한 정복국가 로마의 엄청난 지배계급의 권력을 상징하는 예외적 무대일 뿐, 그곳에서 펼쳐진 검투사들의 잔인한 스포츠란 실상 일반 서민들의 삶과는 무연한 것이다.
전통 연희와 달리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 속에서 부르주와 계급의 이상을 표현하는 근대의 연희는 자본이 오고가는 길목인 도시에서 실내의 극장을 무대로 발전하였다.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들어간 예술은 그들의 후원자인 부르주와 계급의 미적 취향에 봉사하고 때로는 군중들을 계몽하고 지배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였다. 바깥의 삶의 질서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실내극장은 비단 연희만을 위한 공간으로 한정되지 않는 복합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아직 각성되지 않은 군중들을 계몽하기 위한 정치연설이 펼쳐지기도 하고, 어린 학생들이 새로 배운 율동과 노래를 학예회란 이름으로 발표하는 훈육의 장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밀폐된 극장 내에서는 남녀 간의 은밀한 연애나 공식적 사회관계를 벗어난 교제가 허용되는 일탈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곳은 또한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꿈과 환상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일상의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환멸이 가상의 무대공간에서 펼쳐지는 서커스와 연예, 연극과 무용, 음악과 영화를 통해 치유되고 나아가 현실의 자기를 벗어난 타자의 삶을 꿈꾸게 하는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의 극장이란 ‘근대적 인간’의 감성을 길러내는 사회학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다소 딱딱하게, 극장의 의미에 대한 기왕의 논의들을 되풀이한 것은, 필자에게도 어린 시절 경험했던 극장에 얽힌 추억과 그런 극장 중의 하나로 떠오르는 인천시민회관을 되새기보기 위해서이다.
현대극장의 모습
어린 시절 필자가 살았던 송림동에도 현대극장이라는 동시상영관이 있었다. 현대시장 맞은편에 위치한 이 극장은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지금은 극장으로서가 아니라 온갖 값싼 물건들을 진열해놓고 파는 그런 건물로 남아있다. 그러나 과거의 이 극장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이곳에서는 통상 일주일에 한 차례씩 영화간판이 바뀌곤 했는데, 홍콩의 무협영화를 비롯하여 낯 뜨거운 애로영화가 번차례로 올라가면서 어린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때로 이곳에서는 “동남아에서 방금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식으로 선전되던 누구누구의 <초대형 리싸이틀>이라는 것도 종종 열리기도 했는데, 그 화려한 포스터에 담긴 연예인들 그 중에서도 ‘땅딸이’ 이기동이나 ‘비실비실’ 배삼룡 같은 코미디언들을 가끔 볼 수 있었던 귀한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필자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름방학 때 학교 운동장에서 가장 개설되곤 하던 야외극장의 추억이나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게 되는 방공영화나 종교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 이외에는 어린 아이들에게 극장이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터부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우리 또래의 친구들은 극장에서 선전용으로 찍어낸 카드 크기만 한 영화 캘린더를 열심히 수집하고 딱지처럼 따먹기도 하면서 그곳에 그려진 기괴한 영상의 매혹에 침을 흘리기만 했다.
그런 극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드물게나마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삼촌이 조카들에게 오랜만에 기분을 내는 운 좋은 명절날이거나, 아니면 평상시라도 아버지가 모처럼 기분을 내어 우리 형제들 손을 이끌고 갔던 극장의 정경이라니! 미림극장, 문화극장, 오성극장, 자유극장, 애관극장, 도원극장, 동방극장, 인천극장······.
어느 극장을 갔었는지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지금은 기억에 남아있지 나지 않지만 당시 인천에는 참으로 많은 극장들이 있었다.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커다란 은막 위에 펼쳐지던 영상에 매혹되고,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두근거리거나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아버지의 등 뒤로 숨기도 했던 숨 막히는 순간들은 성장기의 중요한 자상으로 남았을 터였다. 영화를 다 보고난 뒤로 아버지가 사주시던 자장면이나 만두, 혹 아버지께서 더 기분이 좋은 날 사주시던 구수한 통닭의 맛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되던 어린 시절 극장에 얽힌 추억.
그 어린 소년, 소녀들이 이제 부모나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법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에 더 탐닉하게 되는 중고등학교의 학생이 되었어도,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남다른 일탈과 환상의 경험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필자가 중학생이 되어 처음 가보았던, 꽤 먼 곳에 위치한 인천시민회관과 그곳에서 보았던 <인천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 <인천고교합창제> 같은 음악공연이나 짙은 분장한 한 배우들이 울림새 있는 목청으로 무대를 종횡무진 하는 연극공연을 보았을 때, 그 때의 경험은 어두운 극장에서 일방적으로 지켜보던 영화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기계에 의해 복제된 빛의 영상 속에 갇힌 비현실적인 환상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영화와 달리 나와 같은 산 사람이 악기와 노래를 연주하면서 거룩한 소리를 내고, 그 공연을 예절을 갖춰 듣는 청중들 속에 내가 앉아 있는 느낌이라니!
인천 극장소사(劇場小史)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 감상이 다소 길어졌지만, 극장은 이처럼 도시의 문명을 구가하는 하나의 상징적 공간이다. 근대문물의 관문지역이었던 인천에는 일찍부터 근대적인 극장이 설립되어 다양한 공연 활동이 이루어졌고 또 많은 전문극단이 내인(來仁)하여 수준 높은 공연을 상연하였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인천에 최초로 설립된 극장은 갑부였던 정치국에 의해 1895년에 지금의 중구 용동에 세운 ‘협률사(協律舍)’라고 한다. 그러나 협률사의 1895년 설립설의 증거가 되고 있는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경기문화사, 1959)을 자세히 보면 뭔가 석연치 않다.
협률사(協律舍)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丁致國)씨가 운영하던 협률사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愛館)의 전신으로서, 일청전쟁(1894-5) 중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는데 전면을 벽돌 2층으로 증축하는 등 누차에 걸친 확장을 거듭하던 끝에, 동란 중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198면)
위의 기록만 보아서는 협률사가 몇 년에 개설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1894-5년에 지었던 단층 창고를 그 후에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다고 기술하였을 뿐, 그 시점이 분명하지 않다. 부호 정치국은 1899년 2월까지도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황성신문(2. 18) 기사도 보인다. 그러나 1900년 이전에 설립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는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상설극장 2개소가 있었다”는 내리교회 존스(G. H. Jones, 한국명 趙元時) 목사의 「New Century」라는 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이로 보면 학계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라고 통용되는 서울의 협률사(協律社, 후의 원각사)보다 인천에서 수년 빨리 개설된 셈이다.
협률사와 함께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인천좌(仁川座)’(1897)와 ‘가부키좌(歌舞伎座)’(1905)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고, 1906년에는 신생동에 상설영화관으로 ‘표관(飄館)’이라는 극장도 개설되었다. 이중 지금의 사동에 세워졌던 ‘가부키좌’는 협률사의 후신인 ‘축항사(築港舍)’(1912)와 함께 1910-20년대에 <혁신단> <취성좌> <신극좌> <민중극단> <토월회> <신무대> 등의 수많은 연극단체들의 신파극, 신극, 소인극 등과 같은 근대 연극의 무대를 제공하여 인천부민의 사랑을 받았다.
인천 애관 낙성식
인천 조선인측 극장으로는 용리(龍里)이 있었던 바 건축한 지 오랠 뿐 아니라 그 경영자 정치국(鄭致國)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특히 수리도 아니 하야 그나마 창파벽퇴(窓破壁頹)하야 간혹 연극단(演劇團)이 인천에 들어올지라도 일본인 경영인 극장을 빌어 쓰는 상황이었는데 인천 유지(有志) 김윤복(金允福)씨는 조선인측으로 상당(相當)한 극장 하나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기어 수만의 금전을 비(費)하야 그간 신축에 착수하였든 바 금번 그 신축이 낙성(落成)하였음으로 지난 10일에 신축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는데 금후 조선인측 공공적 모임에는 언제던지 공개한다더라. - 동아일보, 1927. 10. 13
‘축항사’는 1915년 무렵 ‘애관’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내려오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서 연극과 함께 간간이 활동사진을 틀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극장인 가부키좌와 함께 1923년 2월 새로 개관한 500명 수용 규모의 인천공회당이 20년대 들어 인천의 대표적 실내공연장으로 각종 청년운동을 비롯한 문화 활동 및 문예공연의 주무대가 되면서 애관극장은 점차 쇠락해가고 있었다. 위의 기사는 이렇게 쇠락해가던 조선인 극장인 애관을 김윤복 씨가 다시 신축·낙성하여 인천의 조선인 극장으로 만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이후 애관은 1930년대 들어 활동사진관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고, 국내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40년 초기에는 인천·평양 아마복싱 대항전이 인천 애관극장 특설링에서 개최되어 인천시민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는 회고도 남아있다.
고단했던 시절, 이처럼 인천부민들의 심금을 울려주던 극장 애관이 있었기에 인천에서 진우촌(秦雨村, 극작가), 정암(鄭岩, 배우), 원우전(元雨田, 무대장치가)등과 극작가 함세덕(咸世德)과 명배우 서일성(徐一星)을 배출할 수 있었고, 애관에서 활동사진을 보고 자란 김동석(金東錫)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자라날 수 있었다.
일제의 통제 밑에 갇혀 있다가 해방 후에 일시적으로 분출한 인천에서의 문화적 열기는 많은 극장의 출현을 초래했다. 중추 극장인 애관에서 연극, 영화를 비롯한 각종 대중공연뿐만 아니라 각종 집회가 개최되었다. 해방된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애관극장에서 조봉암의 주도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가 조직된 것은 애관극장이 인천에서 갖는 문화적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애관극장과 함께 식민지시대 내내 영화관으로 쌍벽을 이루었던 신포동의 표관은 1947년 들어 극장을 쇄신하여 문화관으로 재단장하여 역시 다채로운 공연을 펼쳐나갔다. 여기에 영화극장과 제1공회당에서도 많은 공연활동이 이루어졌고, 1946년 8월 14일 개관된 우리예술관에서는 다채로운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
인천 음악인들의 모임인 인천관현악단(仁川管絃樂團)이 1947년 12월 13일 창단하여 각종 음악회를 개최한 것도 이곳 극장무대에서였다. 제1공회당에서의 창립 연주회에 이어 1948년 5월 31일 제2회를 영화극장에서, 1948년 10월 10일과 1949년 12월 14일 제3, 4회 연주회를 문화관에서, 1950년 1월 18일 제5회 연주회를 애관극장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한동안 문화예술도 침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시대의 대표적 공연장이었던 인천공회당과 표관 등이 함포에 맞아 부서지는 비운을 당하기도 하였다. 전후복구의 어려운 사회형편 속에서도 그러나 문화예술의 기운이 서서히 움터 나왔다. 1957년 시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아 부서진 인천공회당 5백여 평의 자리에 1,220석의 객석을 자랑하는 ‘시민관’을 개관하여 영화를 비롯한 각종 행사나 연극, 악극단 공연 및 각종 쇼공연 등을 공연하기 시작하면서 문예의 열기도 다시 높아갔다.
1960년대 들어 시민관, 애관극장을 비롯하여 키네마극장(표관 자리), 인영극장(인천 영화극장의 후신), 동방극장 등에서 개봉 영화가 상영되고, 이어 문화, 장안, 인천, 미림, 오성, 중앙극장 같은 재개봉관들이 속속 개관하면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함께 구가하였다.
인천시민회관의 출현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산업화의 진전과 대중매체의 확산에 힘입은 상업문화의 확산은 인천에도 다양한 형태의 대중문화의 전파를 가져왔고 특히 대중음악의 확산은 극장식 무대를 매개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올림포스, 항구, 국일, 장안, 청청매, 신라회관 등 극장식 업소가 출현하여 대중문화의 확산을 크게 이루었던 것이 이 무렵이다. 한편 19709년에 경동에 돌체소극장이 개관한 것을 시작으로 경동예술극장, 신포아트홀, 배다리예술극장 등과 같은 연극 전문 소극장이 연이어 출현하여 80년대 소극장 연극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70년대 인천문화사에 특기할 것은 1974년 인천시민회관의 개관이다. 인천시민회관의 개관은 60-70년대의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한 인천 지역의 도시 확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1974년 4월 13일 인천시 남구 주안동 190-4번지의 2,003평 대지 위에 1,350석의 객석을 갖추고 탄생한 인천시민회관은 그동안 일본인에 의해 개척된 개항장이 위치한 중구일대가 인천의 중심지였던 것이, 도심이 확장되면서 시의 외곽지역이었던 주안 일대가 인천의 중심지역의 변모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시민회관의 건설에 앞서 중구 율목동에서 속칭 ‘석바위’라고 부르는 주안동 345번지로 인천고등학교가 1971년 6월 5일에 이전한 것과 함께 상징적인 도시개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74년 개관한 인천시민회관은 이후 20여 년간 인천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한 인천문화의 산실이었다. 중구 사동에 위치한 공보관에서도 더러 전시회 같은 것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인천 지역의 공공집회 및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대개 인천시민회관에서 활발히 개최되었다. 그간 이곳에서 공연된 작품들만 해도 규모 있는 문화예술 행사만 해도 총 145회에 기타 공공행사가 327회 개최되었다는 통계가 인천광역시사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각종 문화행사들이 이곳에서 개최되었을 터이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인천 극장사의 여러 궤적들도 여러 단편적 증언들에 기댄 엉성한 것에 불과하지만, 비교적 근년에 설립되었던 인천시민회관의 역사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까지 충실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1966년 창단된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인천시민들에게 다채로운 클래식 선율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인천시민회관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인천교향취주악단 같은 민간 연주단이 1975년 3월 3일에 창단하여 동년 6월 7일 인천시민회관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에 인천시민회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1년 4월 1일 인천시립합창단과 함께 나란히 창단된 인천시립무용단의 주요한 활동무대도 인천시민회관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인천시민회관은 비단 음악 분야에 한정되지 않는 실로 다채로운 문화예술 공연의 산실 노릇을 하였다. 1974년 개관 이후 1981년에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기 이전까지 인천시민회관은 경기도 전통문화예술의 온상이 되었는데, 제1회 경기도예술제 국악부문 무대가 인천시민회관이 개최되었으며, 직할시 승격 이후에는 제물포예술제의 일환으로 인천시민화관에서 국악제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인천의 직할시로의 승격을 기념하는 축제 무대도 인천시민회관에서 개최되었다. 1981년 10월 12일부터 20일까지 9일에 걸쳐 시민회관에서 합창제, 무용제, 연주제, 국악제, 가곡 발표회, 미술·사진작가 초대전, 시화전, 교양 강좌, 시민 서예 공모전을 열어 입상 작품 시상식도 성대하게 베풀었다.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던 인천시민회관
해방 후 한동안 침체했던 인천연극의 부흥을 이끌었던 곳도 인천시민회관이었다. 극단 극우회가 윤조병 극작, 연출로 <도시의 나팔소리> <휘파람새>를 시민회관에서 공연하였으며, 이러한 공연은 이후 연극 전문소극장 시대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0년 7월 1일 시립예술단 중에서는 제일 늦게 탄생한 인천광역시립극단의 초창기 활동문대가 된 곳도 시민회관이다. 전국연극제 제1회, 2회 대회에서 인천극단들이 <도시의 나팔소리>와 <휘파람새>로 연이어 수상한 것을 계기로 추진된 인천시립극단의 창단 또한 인천시민회관이라는 극장을 무대로 가능했던 것이다. 인천시민회관은 1994년 구월동에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개관되기 이전까지 아니 2000년 철거되기 직전까지도 인천시민들에게 문화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5·3 인천사태의 무대
1986년 인천시민회관 앞에서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름하여 ‘5·3인천사태’가 그것이다. 당시 신한민주당은 1986년 2월 12일 직선제 개헌을 위한 천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재야 세력의 호응 속에 3월 11일 서울시지부를 결성하고 연이어 부산, 대구, 대전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4월 29일 당고문인 김대중 민추협공동의장이 소수 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급진적인 세력과 단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분개한 재야와 운동권 세력은, 5월 3일 신한민주당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시민회관에 집결하기로 한 것이다.
5월3일 날이 밝으면서 온갖 정파의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인천으로 모여들었다. 신민당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인 정오 무렵부터 이미 대회장인 주안 시민회관 앞 4거리는 시민·학생들로 가득 찼다. 대회 시작 전부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이에 따른 공권력 투입으로 당 지도부가 대회장으로 입장하지도 못한 채 무산되었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도로를 장악하고 산발적인 시위를 하다가 오후가 되면서 스크럼을 짜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경찰과 충돌하였다. 시위대는 신한민주당의 각성을 촉구하고 이원집정(二元執政) 개헌 반대를 외치며 국민헌법 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후 5시까지 계속된 시위는 제물포를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어 밤늦게 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 사태로 319명이 연행되었고 129명이 구속되었으며, 이후 전두환 정권의 운동권 탄압을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3인천사태
5·3 인천사태는 80년 5월 이후 최대의 시위였다. 그동안 크고 작은 투쟁을 통해 역량을 키워온 민주화운동권은 수도권 일대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 이날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운동권 내부의 분열로 이날 시위는 대규모 폭동 이상의 아무런 의의도 얻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관념적 급진주의는 오히려 대중을 등 돌리게 만들었고 탄압의 빌미만 제공했다.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면이 반전될 때까지 민주화운동은 수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5·3사태를 계기로 운동권 내부에서 반성의 기운이 싹트기에 이르렀다. 관념적 급진주의와 소아병적 헤게모니론이 비판대에 오르면서 현실에 뿌리박고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6월항쟁이 준비되고 있었다.
- 「실록민주화운동 69 - 5·3인천사태」, 경향신문 2004. 9. 5.
최근에 한 신문은 이 사건을 「실록민주화운동」이라는 기획에서 위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사건은 그 명칭에서부터 그 역사적 의의까지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인천 지역에서는 지난해 5월 2일을 맞아 ‘5·3민주화운동 기념사업추진위위원회’를 구성하고 <5·3운동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심포지엄을 열고 그 계승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고 그 무대를 제공했던 인천시민회관의 작은 역사에 있어 5·3인천사태는 그 정점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1980년대 인천문화의 중심공간이었던 시민회관은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1985년 10월 25일 인천직할시 신청사가 구월동에 완공되어 12월 시청의 개관하기에 이르자 인천 지역의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역으로 남동구 일대가 부상하게 된 것이다. 연이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역시 구월동 지역에 입지를 확정하고 1990년 공사에 착공해 1994년 1월에 1만6천여 평의 부지에 대소 공연장 및 전시장을 갖추고 개관하기에 이른다. 1992년에는 시민회관에 지하전시실을 설치하여 각종 전시를 개최하는 복합공간을 꾀하였지만, 그러나 이미 노후화된 인천시민회관은 전성기를 지나서 1990년대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극장은 사라져도 공간만은 남아
그 숨 가빴던 산업화 시대에 인천시민들과 고락을 함께 했던 인천시민회관은 1999년 지역 사회의 뜨거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인천시민회관을 헌 자리를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었다. 결국 인천의 시민사회는 시민여론의 수렴과 ‘시민회관 부지 활용방안에 관한 시민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어렵사리 이곳을 녹지공간으로 바꾸고 시민들의 쉼터로 바꾸기로 합의하였다. 지역사회의 이러한 합의에 따라 인천시민회관은 2000년 9월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11억의 예산을 들여 오늘날과 같은 공원형의 ’옛시민회관 쉼터‘로 바꿔놓았다.
현재의 ‘옛시민회관터 쉼터 공원’
그런데 최근 이 공간을 둘러싸고 다시 논란이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인천시에서는 이곳에 3층 높이까지는 녹지로 사용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공연시설, 미술관, 전시장, 소극장 등을 두루 갖춘 종합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겠다고 한다. 때마침 남구에서도 시민회관 부지를 포함한 주안역 일대를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벨트로 조성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중이라고 하니, 주안역과 시민회관터로 이어지는 미추홀길 일대를 새로운 문화의 중심으로 꾸미려는 계획의 일환일 것이다. 이러한 계획들과는 별도로 일각에서는 5·3민주화운동의 현장인 이곳에 민주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계획들은 편중된 도시의 기능을 다핵화하고 아울러 도시공간의 공공적 활용에 대한 문화적 해석이 담긴 계획이라는 점에서 그 나름의 생산적 토론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민과 관이 어렵게 이룬 합의를 통해 마련한 쉼터 공원을 3년 만에 재론하는 것도 문제거니와, 더 큰 문제는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개발하겠다는 발상이다.
혹시나 이 공간이 아직도 도시계획상 상업지역으로 남아있고 게다가 시 소유의 부지이고 하니, 민간자본만 끌어드리면 뭔가 그럴듯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약은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가시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의 옛시민회관 쉼터는 다른 어떤 도시공간이 하지 못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고밀도의 도시공간 속에서 이만큼의 개방된 녹지공간이 주는 쾌적함과 해방감을 기능적 효용성만으로 측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녹색의 잔디가 깔려있는, 서울 시청 앞 잔디광장을 떠올려본다. 하기야 현재의 옛시민회관터 쉼터는 너무 오밀조밀한 인공시설로 치장되어 있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거친 산업화의 시대에 인천시민들과 함께 하며 인천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던 인천시민회관은 이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공간만은 지금도 남아서 우리 도시인들에게 여전히 휴식과 위안을 주고 있다. 이 공간을 두고두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논란이 제기된 이상 자못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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