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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망각 너머에 세운 조그만 기억의 주춧돌

by 형과니 2023. 3. 7.

망각 너머에 세운 조그만 기억의 주춧돌

仁川愛/인천이야기

2006-12-26 01:39:16

 

 

망각 너머에 세운 조그만 기억의 주춧돌- 세 개의 표석에 얽힌 이야기

이 희 환(인하대 국문과 강사)

 

개발의 삽날에 사라지는 흔적들

 

남구 학산문화원에서는 남구 지역의 역사를 더듬고 그로부터 남구 지역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남구 역사 찾기>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타 문화원과 달리 창립 준비작업 과정에서 문화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문화원 사업의 색다른 방향모색을 준비하는 과정에 떠오른 것이 <남구 역사 찾기> 사업이었던 것이다.


그 구체적 사업의 하나로 진행된 남구 문화유적 표지석 세우기 사업의 실무를 맡아 진행하면서 필자는 새삼스럽게도 매우 소박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급격하게 변모하는 우리네 삶의 저편으로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과거를 망각 속에서 되살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 조그만 기억의 주춧돌이라도 높고자 하는 우리는 노력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리 오래 전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리하고 있던 삶은 흔적과 기억들이 정처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형편이다. 과거를 돌아볼 여유도 물론이고 미래를 실답게 계획하고 꿈꿔볼 요량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왔던 한국의 근현대사가 아니었을까. 한 장의 빛바랜 사진이 문득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터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과거사 청산 문제만 해도 그렇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지금 여기’의 삶에 매몰되다 보니 정작 그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온몸에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들이 치유할 수 없는 통증으로 남게 되었던 것 아닐까.

역사는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옛 인천의 중심이었다가 근대의 개항 이후 변두리로 밀려났던 남구 지역은 7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반짝 옛 영화를 회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 다시 구도심 지역으로 낙후되면서 새로운 개발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개발이 필요하다면 물론 개발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까지도 불도우저로 밀어버리듯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개발방식이 만연해 있다. 자본의 논리든 권력의 힘이든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개발로 인해 당장은 막대한 이익이 발생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인간적 가치의 상실과 문화의 황폐화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이러한 비문화적 폭력에 만성화되어 타성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구 학산문화원이 <남구 역사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세 개의 문화유적의 흔적을 찾아 나서면서 새록새록 드는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500년 가문의 영화가 숨쉬던 자리- 인천 경주김씨 여우실 종가터인천광역시 남구청 종합민원실은 현대적 건물에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남구 구민들의 민원을 실용적으로 해소해주는 공공기관으로 단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민원실 자리는 원래 경주김씨 문중이 5백년 동안 터전으로 삼아왔던 종가댁이었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도 표지석을 세우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다른 중요한 문화유적이 많은데 한 가문의 종가가 있었다고 하여 문화유적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었다. 이곳이 500년 된 가문의 종가터였다는 것, 이 가문에서 인천 출신의 최다선 국회의원이자 11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은하와 같은 유력 정치인이 배출되었다는 것 때문에 표지석을 세우려 한다면 아무래도 그 이유가 협량하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인천에서 문화유적의 가치를 따져보자면 훨씬 귀중한 문화유적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동과 같이 오래된 고댁과 종가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는 도시라면 몰라도, 인천과 같은 근대도시에서 이미 스러지고 없는 한 가문의 종가터임를 밝히는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 그리 정당치 못하다고 의심도 되었다. 이 종가댁이 언제 없어졌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종가댁의 규모나 건축미는 어떠하였는지도 정확히 고증하기 어려운 마당에 이런 표지석이 무슨 소용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위치도 이미 확정되어 있고, 표지석 세우기 사업을 주관하는 남구청 소유의 공공시설 바로 앞이라 표지석 설치에 관하여 행정적 절차도 간소하면서, 인천 경주김씨의 후손들이 있어 그 종가터의 의미에 대해 일러주는 내용들이 있어 표지석을 세우는 작업은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2004년 9월 14일날 제일 먼저 제막된 <인천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터> 표지석의 문안은 아래와 같다.막상 종가터 표지석을 세우고 나니, 그 주변을 지나가는 주민들의 발길이 자연 그 앞에 머물고, 이 짧은 문구를 읽어가면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곁에서 들으면서 필자의 생각도 달라지게 되었다.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전문가연하던 필자였지만, 숭의동의 옛이름으로 “여우실”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는 점도 처음 안 사실이거니와,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한 가문이 18대에 걸쳐 500년을 이어내려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가파르고 급격했던 탓에 오히려 소박하면서도 일상적인 생활의 자태를 모두 잃어버리고, 늘 ‘새것’에 목말라하며 살아왔던 것이 이미 우리 몸에 밴 삶의 방식 아닌가. 어쩌면 한 가문의 과거의 영광을 기록한 소소한 기록이자 표석일지 모르나, 이러한 작은 역사와 기록들을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고만 탓에 오늘 우리의 문화는 국적불명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사 중심의 오래고 낡은 역사학에서 미시사니 생활사니 하는 새로운 분야가 역사학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뭐 그런 거창한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공공기관인 남구청에서 종합민원실 앞 화단을 비워 솔선수범하여 작은 역사를 되살리는 표지석을 세웠다는 것에는 작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사라진 해신제의 풍습과 바위섬에 얽힌 추억- 낙섬터, 원도사지인천에서 터전을 잡고 500여년을 살아왔던 한 가문의 사라진 종가터의 흔적을 찾는 것 못지않게, 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변형된 인천의 자연과 그 자연환경 속에서 선조들의 슬기로운 생활 풍습을 되새기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토록 번화한 도심지 한가운데인 주안역 주변에 바닷물이 들고날며 너른 소금밭 염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이제 역사의 기록을 뒤적여서나 알 수 있다. 용현동에서 시청 방면으로 시원스레 내뚫린 인주로 밑에는 서울의 청계천마냥, 복개된 승기천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도 어른들의 회고를 듣지 않고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특히나 황해바다와 곁하여 살아왔던 인천 지역은 오래 전부터 계속된 갯벌의 매립과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자연 그대로의 남은 해안이 거의 사라졌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 와중에 인천 앞바다에 점점이 떠서 어부들의 뱃길잡이이자 쉼터이기도 했던, 뭍에서의 지친 삶을 그 아름다운 서경으로 달래주었던 어여쁜 섬들도 하나둘씩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예전의 인천지도를 들춰보아야만 그 이름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섬들 중에서 낙섬이라는 섬이 있었다. 낙섬, 말 그대로 홀로 떨어진 외따른 섬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섬이 없어진 것이 20년 어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송림동 일대에서 줄곧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내었던 필자에게도 어느 기억한 한 켠에는 낙섬의 영상이 남아있을 법도 하건만, 송도유원지에서 이어진 아암도의 기억 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구터미널 앞에서부터 쭉 뻗기 시작하는 해안도로가 제2경인고속도로를 만나기 직전의 사거리, 우회전하면 연안부두로 가는 다리가 나오고 좌회전하면 새로 밀집된 아파트촌으로 들어가는 그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자마자 왼편에 보이는 북한음식점 <평양옥류관> 자리가 바로 바위섬이었던 낙섬이 있던 곳이라 한다. 

 

9월 14일 두 번째로 제막한 표지석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새겨졌다.1970년대 초까지도 낚시도 하고 해수욕도 즐기던 낙섬은 분명 인천시민들에겐 애잔한 추억이 서린 바위섬이었다. 그런데 이 섬은 가치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지도에는 이 섬이 원도, 혹은 신도라 표기되어 있는바, 이는 ‘원숭이섬’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종묘사직의 중심인 한양에서 이 섬의 위치가 신(申: 서남서) 방향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고 김상열 시립박물관 학예사는 추정한다. 그 반대편인 강릉에서 동해의 해신에게 제를 지낸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의 안위와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매년 봄, 가을로 국왕을 대신해 인천의 수령이 서해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령스러운 곳이 바로 낙섬이었던 것이다.


낙섬은 또한 임진왜란을 당하여 인천의 수호신으로 전승되는 김민선(金敏善) 부사와 함께 병자호란의 수호신으로 기억해야 할 이윤생 장군의 아름다운 전적이 서려있는 곳이다. 사라진 해신제의 풍습과 어린시절의 추억은 고사하고 그 위치마저 종작을 잡기 어려워지기 전에 표석을 세운 일이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다. 표지석 덕에 낙섬의 흔적이나마 찾아보려거든 <평양옥류관>에 들어가 볼 일이다. 낙섬의 바위가 무슨 오래된 즘생처럼 아직도 묵묵히 숨을 쉬고 있다.

 

 

위치마저 찾을 길 없던 학산서원

 

학산서원터이미 그 위치를 번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 <인천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터>와 시립박물관 윤용구 학예실장님의 안내와 <평양옥류관> 구판수 사장님의 친절한 배려로 그 위와 표지석 자리를 마련했던 <낙섬터-원도사지> 표지석에 비하여 올해 <남구 역사 찾기> 사업에서 제일 큰 어려움은 <학산서원터>를 찾는 일이었다. 이번 사업의 정점에 해당하는 <학산서원터>의 위치를 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던 데다가 도로변에 황무지처럼 버려진 곳에 위치했던 탓에 표지석 하나만 달랑 세워놓는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이경성 관장님의 주도하에 문학산 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최초의 지표조사가 있었지만, 그 뒤로 한국전쟁을 겪었고, 수차례의 도시개발과 근래의 문학터널의 준공 등으로 하여 학산서원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1949년 조사를 바탕으로 시립박물관 학예사 분들의 안내를 받아 현장을 가보았지만, 학산서원의 위치로 추정되는 지번들에는 문학터널로 들어가는 도로가 광포하게 뚫려버려 어디쯤을 정확한 위치로 삼아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남구청 지적과에서 토지이용계획확인서도 떼 보고, 도시계획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지번의 위치를 알려주는 여러 도시계획 지도도 입수하였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지적 측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적 측량의 결과 신기촌에서 문학터널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오른편 언덕 위를 학산서원의 위치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산 북록의 비교적 평탄한 부지에서 승학산의 인천향교를 바라보며 위치했던 학산서원 터의 일부는 이미 도로에 수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도로변 바로 곁 평탄한 곳으로 남아있는 자투리 땅에 시립박물관 윤용구 학예실장이 찬(撰)한 표지석을 세우고 제막식을 올렸다.인간적 가치를 보듬는 문화의 힘인천향교, 인천도호부청사(‘인천관아’라는 부르는 것이 역사적 실상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와 함께 전통시대 인천문화의 한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학산서원인데, 그 위치나마 제대로 찾아 밝혀내는 일이 이처럼 힘들 줄은 미처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천문화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아직도 우리가 찾고 되새길 많은 문화유적들이 기억에서조차 묻혀가고 있다는 초조한 생각도 들었다. 문학산 정산에 위치했던 안관당(安官堂)과 봉수대도 빨리 시민들의 생활 속에 되살려야 할텐데······.

 

이번에 세운 세 개의 표지석이 말해주듯, 개발에 개발로 이어지면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우리네 삶의 처연한 모습을 그나마 보듬고 지켜가야 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고 문화의 힘일 터이다. 이경성 선생의 발품과 이종화 선생의 사진 덕에 오늘날 문학산은 그나마 인천문화의 자긍심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문화도 더 이상 수동적인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답답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이면서도 능동적인 문화의 힘, 곧 문화운동이 꿈틀대며 살아있어야 인간적 가치를 지키고 보듬는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 인천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종작없이 거듭 샘솟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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