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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양키시장

by 형과니 2023. 3. 8.

양키시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39:44

 

양키시장

 

인천시 동구 송림동 100번지 중앙시장. 인천인들에겐 양키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앙시장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해방직전인 1940년대 초 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물건을 사고 팔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앞에서 청과물을 팔던 채미전거리가 활성화하자 역 뒷편을 중심으로 노점상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을 이뤘다는 것이다.

 

양키시장

 

그러다 일본이 패망할 무렵 인천상공협회 창립자인 尹昌浩씨가 축현역 뒷편 개천가에 야시장지금의 포목점포 상가 일대을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야시장 개설후 맞은 편 공터에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씌워 인천부 일용품공설시장을 설립하고 관리를 일본인 노나까野中에게 맡겼다.

 

원래 중앙시장 주변엔 바다와 연결, 수문통을 거쳐 배다리로 바닷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다. 바로 이 개천을 복개한 후 건물을 지어 시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비가 내리고 나면 길바닥에 하얀 소금기가 배 나오고 있다.

 

송림동에서 60여년을 살았다는 라이프경영연구소장 朴勝鶴67는 옛 중앙시장의 모습을 이렇게 떠올린다. 중앙시장은 오전 5시에 문을 열고 저녁 8시 쯤이면 문을 닫았어요. 갖가지 물건과 밑반찬 종류, 생선 등이 많았습니다. 어머니 손잡고 시장가는 게 얼마나 좋았는 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하지만 그 중앙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폭격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그리고 이북 피란민들이 이 일대에 토굴을 파고 판자로 집을 지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피란민들은 노숙자와 뜨내기들을 상대로 잠자리를 빌려주거나 순대나 곱창을 팔며 장사를 했다. 그 때 생겨난 순대골목은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면서 해주식당」 「평양식당」 「황주집등의 간판을 남겼다.

 

중앙시장은 동쪽으론 배다리 철로문과 꿀꿀이죽, 양고기 등을 파는 골목길창영동과 이어졌고 반대쪽으론 화평동 철로문_만석고가 까지 판자집이 늘어서면서 서민생활의 중심지로 변했다.

 

인천석금」(저자 高逸에 따르면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제물포상인보존회를 중심으로 시장을 운영하려 했으나 재정난으로 활동을 못했다고 한다. 이어 인천상우공동조합도 시장을 설립하려 했지만 조합간부의 공금유용으로 좌절됐다. 그러다가 19615·16 군사구테타가 발생한 뒤 중앙시장은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당시 혁명군 핵심원으로 인천시장을 지낸 柳承源씨가 주변을 정리하면서 판자집을 헐어내고, 구획을 정리한 후 예전처럼 지붕을 덮은 것. 이 곳에서 40년여년간 옷가게를 운영하는 金泰燮65시장바닥을 공사하면서 안 일이지만 일본인들이 기초를 얼마나 튼튼하게 했는 지 공사중에 길고 굵은 주춧돌이 너무 많아 터파기 공사에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이후 경찰이 난립한 무허가 건물을 정비하고 시내 불량배들을 선도하기 위해 결성한 애지단愛志團)」이 자유시장이후 중앙시장으로 변경이란 이름으로 상가를 본격적으로 운영하면서 자리를 잡자 부평역 앞과 신포동, 답동 등지에도 시장이 새로 단장됐다.

 

일제 때부터 장사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전쟁 전만 해도 여염집 여자들이 장사를 하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전쟁 후 피란민 여자들이 좌판을 벌여 노점상이 늘기 시작하면서 생활이 어려운 다른 주부들도 장사에 나섰다. 아울러 부평 등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물건을 밀거래하는 이들이 몰려 들면서 이 곳은 양키시장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처음엔 군복을 염색해 팔다가 아는 사람 소개로 미제물건을 취급했지요.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경찰이나 미군 헌병들이 들이닥쳐 물건을 빼앗아가기 일쑤였지요.경기도경찰국현 인천지방경찰청에서 경위로 재직하던 남편이 6.25때 전사한 뒤 4남매를 키우며 30여년 동안 미제물건을 팔았다는 모씨77의 얘기다. 그는 경찰이나 헌병이 단속을 나오면 좌판을 싸들고 달아나거나 국산물품으로 바꾸는 소동을 한달에 대여섯 차례 볼 수 있었다일부 경찰이나 군인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뒤를 봐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전쟁 직후 미군의 원조품이 늘어나면서 씨처럼 미군부대에서 빠져나오는 군복이나 군용품, 통조림, 담배 등을 파는 상인들이 급격히 늘었다. 부평 미군부대 등에서 불법으로 구입하거나 한국인 군무원들이 몰래 갖고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암달러상도 이 때 생겨난 것 중 하나다.

 

물자부족으로 입을 게 풍족하지 않던 그 무렵 청년들 사이엔 중앙시장서 값싼 군복을 사서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들은 군화 목부분을 잘라 신고 다니기도 하고 악세서리를 군용물품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그런 중앙시장에도 이제 변화의 바람이 불어 중저가용 옷가게 등이 늘고 있지만 아직도 사제군복과 미제물품을 주로 파는 상점과 옷수선업소들이 남아 인천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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