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이야기

인천의 박물관

by 형과니 2023. 3. 8.

인천의 박물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3:21


박물관은 「문화창조의 센터로서 지역 사회·문화 발전의 척도」로 일컬어진다. 영어 「Museum」의 유래를 봐도 박물관이 어떻게 시작됐는 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기원전 3세기께 이집트 왕 프톨레마어 Ⅱ세가 부왕의 뜻을 이어 궁전 한 켠에 진귀한 수집품들을 모아 놓고 그리이스 학자들을 초청, 철학과 문예를 연구했으며 이곳을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해 철학, 미술, 문예 등을 담당하는 여신인 「Muse」에게 바쳤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것.

우리나라도 개화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영향으로 박물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기 시작됐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으면서 인천에서 박물관이 태동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지만, 현재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한 인천시립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공립박물관이었다.

처음 박물관 개관 준비에 들어간 것은 1945년 10월. 인천 태생의 이경성(李慶成)씨가 동경 유학시절 경기도 출신인 근대 한국 미술 사학가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4~44)의 처남 이상래씨를 만나면서 부터다. 당시 고고학에 뜻을 두었던 이경성씨는 서신교환을 통해 고유섭선생에게 지도를 받으며 장차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종사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 해 제 2차 세계대전으로 귀국한 이경성씨는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김재원박사와 만나게 됐다. 몇개월동안 김박사 등과 함께 경복궁내 자경전에서 일을 한 이경성씨에게 어느 날 미군정관 홈펠중위와 통역관 최원영씨가 찾아 갔다. 이들은 이씨에게 『인천에 향토관이 있는데 그 건물을 임대해 박물관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10월 31일 초대 임홍재(任鴻宰)시장은 시장실로 이씨를 불러 인천시립박물관장 발령을 냈다.

처음에 시립박물관이 개관한 곳은 중구 송학동 1가 1번지 현 자유공원이었다. 이경성씨는 『시립박물관 건물은 독일사람이 구한말에 지은 세창양행 사택이었다. 설계도 잘 해 놓았고 외관도 12개의 아치를 갖춘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회고한다.

박물관을 개관할 무렵 가장 큰 문제는 전시유물의 확보였다. 박물관장 발령 후인 다음해 46년 4월 1일로 못박은 개관일이 코앞에 닥쳤지만 전시공간을 채울 전시물들이 부족했다.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엉겁결에 관장이 된 이경성씨는 홈펠중위의 도움과 국립박물관 김재원 관장을 졸라 문화재급 유물 19점을 마련했고, 이어 국립민족박물관 송석하 관장을 설득해 민속품 60점 등을 모았다. 또 폐전후 돌아가는 일본인 세관창고에 맡긴 물건들 가운데 몇점을 문화재 반출 금지를 내세워 거둬들였다. 서울 공덕동에 살고 있던 골동품상 장석구(張錫九)씨에겐 도자기 19점과 현금 등을 지원받기도 했다.

이경성씨는 『그 과정에서 인천부평조병창에 일본인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전국 사찰에서 끌어다 모은 각종 불상과 종들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을 미군 트럭을 빌려 싣고 왔다』고 전한다. 이 종과 불상들은 지금 시립박물관 정면에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전시물은 모두 3백64점. 미흡하긴 했지만 당시로선 박물관의 면모를 갖추었던 셈이었다.

박물관 개관과 함께 관원 교육과 고적 조사가 본격화됐다. 그리고 개관후 50년 초까지 이건영(李健英), 최성진(崔星鎭), 이영식(李英稙)등 지역내 문화예술인을 강사로 초빙해 「박물관」 「동양화이야기」 「음악론」 「정치와 시인」등의 과목을 강의했다. 47년엔 인천시립박물관 이름으로 「경주고적조사단」을 구성해 현지조사를 마치고 그해 7월 1일엔 사진등을 곁들여 「경주고적조사보고전」을 열기도 했다.

그러다 시립박물관은 6·25전쟁으로 50년 6월 27일부터 무기한 휴관에 들어갔다. 그 때 관장과 관원들이 북한군들의 눈을 피해 박물관 아래 구 시장관서와 방공호에 3백여점의 유물을 숨겨 보존한 일화는 아직도 인천인들에게 회자된다. 하지만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박물관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2년 10개월 동안 휴관후 53년 4월 1일 현재 인천문화원 건물인 제물포구락부로 이전, 복관한 박물관은 전쟁후 폐허 속에서도 문화영화상영과 문총(文總)활동 장소 제공, 미전(美展)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면서 척박한 인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특히 55년부터 68년까지는 시립박물관 부흥기로 불린다. 56년 4월 「인천향토사료발간」, 64년 영종도 고인돌 발굴조사 등 다채로운 작업과 연구조사활동을 펼쳤으며 유물·유적의 확보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후 시립박물관은 90년 5월 4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안정기에 들어갔고 현재 3명의 학예연구사가 각종 사료정리와 발굴조사, 각급 학교 학생 교육 등에 땀을 흘리고 있다.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는 시지정 유형문화재 5점을 비롯 기념물 1점, 문화재 자료 2점을 포함해 4천7백50여점에 달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국내 최초의 공립박물관이라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국보나 보물 등을 단 한점도 소장하고 있지 못한 데다 임명직인 박물관장은 몇년 채우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원 5명인 학예연구사도 충원되지 않고 있다. 시립박물관 위상 정립을 위한 재원확보와 인원충원 등의 지원책 마련이 시급한 때다.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차통학  (0) 2023.03.08
인천의 명물, 냉면  (0) 2023.03.08
요리집과 권번  (0) 2023.03.08
인천의 성냥공장  (0) 2023.03.08
만석동 똥마당  (0)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