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도선사 유항렬씨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7-18 21:53:38
인천인물]국내 첫 도선사 유항렬씨
인천항의 상징 시설물인 갑문에는 관제탑이 바라다보이는 친수공간 한 편에 높이 3 너비 80~100㎝가량의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1984년 12월 21일 한국도선사협회가 세운 도선사 기념비(導船士 記念碑)다.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 기념비는 고 유항렬(劉恒烈) 도선사가 1937년 5월 3일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항에서 도선 업무를 개시한 것을 기념하고 또한 1957년 11월 22일 도선업무 수행 중 순직한 김선덕(金先德) 도선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를 건립하다'. 비문의 주인공인 도선사 유항렬(1900~1971.12).
▲ 인천항 갑문에 설치돼 있는 유항렬 도선사 기념비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갑종 선장이자 도선사로 인천항은 물론 근대 국내 해운계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20년대 후반~30년대 초 일본에서 유럽과 북미항로 항해사로, 30년대 중반에는 인천에서 중국을 오가는 상선의 선장으로 망망대해를 누볐다.
제2차 대전의 광풍이 인천항을 휩쓸던 40년대 암울한 시기와 해방 직후 및 6·25를 거쳐 60년대 경제성장 시기까지 도선사로서 그는 인천항을 묵묵히 지켜냈다.
도선사를 천직으로 여겼던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사명감은 그가 마지막 도선을 마친 뒤 가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것이 마지막 도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정년퇴직이라고는 하지만 바다로 향한 나의 애착과 집념엔 결코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죠."
-<주간한국 1970년 12월 6일 발행>
그가 숨지기 1년 전인 1970년 11월 21일 팔미도에서 각종 잡화를 가득 실은 미국 국적의 1만급 상선 하와이호를 인천항 내항까지 도선한 뒤 토로한 심경이다.
유항렬 선생은 1900년 11월 22일 충남 공주군 공주읍 교동 51에서 태어났다. 공주 공립보통학교와 일본 나고야 중학을 거쳐 일본 동경고등상선학교에 입학한 뒤 1925년 3위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 1946년 도선을 마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일본에서 유럽과 북미 항로를 오가는 상선회사에서 2등 항해사로 일하다 1930년 귀국한다.
귀국 후 상하이 항로에 취항하던 평안환(2천t) 등에서 선장으로 일하던 그는 1937년 5월 인천항 도선업 면허를 획득한다.
이후 1970년 11월 21일 마지막 도선할 때까지 그는 34년간 3천척가량의 각종 선박을 안전하게 인천항으로 입·출항시켰다.
그는 30년이 넘는 도선사 생활 중 가장 보람이 있었던 기억으로 1947년 미 화물선 리퍼블릭호(2만5천t) 등 구호물자 등을 실은 군함과 화물선 50여척을 인천항에 입항시킨 일을 꼽았다.
구호물자를 실은 선단은 심한 풍랑 때문에 상륙을 못했다고 한다. 육지에서는 물자 고갈로 난리를 겪고 있었지만 속수무책. 그 당시 심경을 그는 이렇게 밝혔다.
"리퍼블릭호에 올라 모든 선단을 이끌고 내항으로 들어올 때는 동포를 생각하면서 어깨가 으쓱하더라고."
-<주간한국 1970년 12월 6일 발행>
또 1·4 후퇴 당시에는 도선사라는 책임 때문에 인천항에 있는 모든 선박을 안내해서 출항시킨 다음 최후로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선사는 위험하지만 고수입 업종이다.
그가 타계하기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일화를 보면 믿기 어려운 부분도 많을 정도다.
보도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그는 초대 해군참모총장직을 제의받았고 또 4·19 직후 들어선 허정 과도정부에서는 해양대학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에 대해 그는 한 언론인터뷰에서 솔직히 털어놨다.
▲ 1970년 11월 21일 마지막 도선을 위해 팔미도로 향하고 있는 유항렬 도선사
"난 바다를 떠날 생각도 없었지만 내가 장관을 하면 어떻게 먹고 삽니까? (거짓말하는 재주가 없으니까)장관 월급이 얼마요? 파일럿(도선사) 노릇하는 것만 못합니다."
고수입 덕분에 그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여유있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근면성실하고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10남매 중 넷째 며느리인 정경희(60)씨는 "식구들과 외식을 하면 자식들은 가장 좋은 음식을 먹이면서 아버님께서는 오므라이스만 드셨어요. 가장 저렴한 음식이었죠. 옷도 작업복을 즐겨 입으셨어요. 당시 주안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벌레가 먹거나 상처가 난 것은 항상 아버님이 드셨다고 해요"라고 회상했다.
근대 해운의 선구자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련 업·단체 및 지역사회에서의 관심이나 재조명은 아직 미미한 게 현실이다. 일제 강점기 수탈과 전쟁 수행을 위한 창구로서, 또 경제성장기 수출입 무역항으로 성장해온 인천항.
도선사 유항렬은 그 역사발전 과정에서 큰 획을 그었지만 지금 그에 대한 업적과 평가는 너무 초라하다.
▲ 수리 공사가 한창인 2층 내부의 모습.
■ 인천 중구 내동 '유항렬 주택'
인천시 중구 내동 143의 1에 위치한 '유항렬 주택'은 근대 건축물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1933년 지어졌다.
대지면적 223.47㎡에 건축면적은 115.37㎡.
유항렬 도선사의 후손들이 번갈아 거주하다 10여년 전부터는 방치돼 왔다. 유항렬 도선사의 4남 부부가 내년부터 다시 거주하기 위해 현재 내부 수리가 한창이다.
건축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문틀이 전혀 변형되지 않을 정도여서 내부 수리공사 관계자들이 놀라 입을 벌릴 정도다.
▲ '유항렬 주택' 전경. 지역 주민들에게는 '내동 벽돌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대식 붙박이장을 비롯해 채광과 통풍을 조절할 수 있는 이중 덧창 구조도 이채롭다.
조형미도 뛰어나 창호는 벽돌아치를 틀고 현관은 원주를 세웠다.
2층에 있는 베란다는 남쪽이 아니라 서쪽인 팔미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유항렬 도선사가 집에서 망원경을 통해 인천항에 입항할 선박이 오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쉽지만 지금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시야를 가리고 있다.
■ 도선(導船)이란 ?
항만·운하·강 등의 일정한 도선구(導船區)에서 선박에 탑승해 해당 선박을 안전한 수로로 안내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선박이 아닌 500t 이상의 선박과 국제항해에 취항하는 500t 이상의 우리나라 선박 등은 해양수산부령이 정하는 도선구에서 해당 선박을 운항할 때에는 반드시 도선사를 태워 지시를 받게끔 강제도선 규정을 두고 있다.
6천t 이상의 선박에서 5년 이상 선장으로 근무해야 도선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231명의 도선사가 활동 중이고, 인천항에는 52명이 근무하고 있다.
한국도선사협회 자료 등에 따르면 도선사의 역사는 기원전 1천년께까지 거슬러올라가 고대 페니키아(현재 레바논 부근)의 '다니아'라는 항구에서 도선서비스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도선이 이뤄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신라시대 일본의 '유당사선(630~804년)'이 한반도 남해안을 통과할 때 도선사가 승선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현물로 거둔 조세를 선박으로 운항하는 '조운(漕運)'의 귀선 시 선박마다 도선에 능한 자 2~3인을 승선시켜 선박마다 지휘하게 하라는 규정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대부분의 도선서비스가 일본인에 의해 이뤄졌고 한국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인 도선사가 모두 떠난 뒤 인천항에서는 유항렬 도선사만 있었을 정도였다.
2007년 07월 1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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