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출신 영화인,배우 황정순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7-12 22:38:03
인천 출신 영화인,배우 황정순
▲ 1959년 6월 21일 일요일자 옛 '경인일보' 에 게재된 영화배우 황정순을 소개하는 기사 원문
“가정주부 타입의 여우(女優)” 황정순(黃貞順) 이 제목은 1959년 6월 21일 일요일자 옛 <경인일보>에 게재된 영화배우 황정순을 소개하는 기사의 헤드 타이틀을 빌린 것으로, 당시 이 신문은 오늘날의 <경인일보>와는 달리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이 신문사에서는 7월 4~, 5일 양일간 향토 예술인 초청 무대로서 '제1회 인천 출신 영화인 귀향 예술제'를 기획했는데, 초청 대상자 소개 시리즈인 ‘봐 주세요’ 코너의 첫 인물로 황정순을 내보낸 것이다.
“성하의 계절을 장식하고 메마른 서정의 사회를 일시나마 낭만 속에 이끌어 보려는 의도와 6·25 9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제물포(仁川) 출신 영화인 귀향 영화제’를 기획하여 우리 고장에서 태어난 한국 예술계의 톱스타를 망라한 이들의 귀향 예술제는 인천사상 최초의 행사일 뿐만 아니라 지닌바 의의가 매우 큰 점에서 벌써부터 도하 전 시민의 열광적 기대를 독점하고 있는 터입니다.”
행사 개최를 알리는 신문사의 사고(社告) 내용이 이처럼 자신만만하면서도 자못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아마 이런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인천이라는 지역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 인천은 영화계를 포함한 전체 연예계에 내로라하는 걸출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한 데다가 이들 출향 연예인들의 애향심이 유달리 각별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말 그대로 찬란했던 스타들! 지금은 다 기억 속에 희미한 흘러간 옛 스타가 되고 말았지만 그 중 빼어난 여자 배우의 한 사람, 영원한 한국 가정주부의 표상(表象)이었던 황정순이 우리 인천 출신으로서 이 영화인 귀향 예술제에 참가하고 있었음을 아는 사람들도 또한 이제는 많지 않을 듯 싶다.
“무엇보다도 사생활에 건실하다는 점이 기특하게 여겨진다.” 그 무렵 영화 「자유부인」에서 ‘최고급품 사나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 주선태(朱善泰)가 황정순에 대해 평한 말이다. “여배우라 하면 이 세상 여자와는 좀 다른 지역에 사는 인간인 듯이 자처하여 냄새를 피우고, 활동사진 몇 개에 얼굴이 나타나기만 하면 명동 거리에 치맛바람을 일으켜 마지않는 요즘 세태--아니 요지경 속 영화계에서는 보기 드문 여배우라는 것이다.”
이 요조숙녀 인기 여배우 황정순의 실제 출생지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이다. 1925년 8월생이니까 금년 83세.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오게 되고 여기서 영화학교에 입학한다. 본인의 구술(口述)로는 늘 몸이 아파 겨우 학교를 다닌 것으로 되어 있는데 4학년 때, 영화학교의 일본인 선생이 싫어 잠시 인근 학교(창영학교인 듯)로 전학을 하고, 그 무렵 서울 수학여행에서 유명한 와이즈 뮐러 주연의 ‘타잔’ 영화를 보고는 그것이 단초가 되어 배우에 대한 선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서울 사촌 언니 황금순한테로의 가출로 이어지고, 결국 15세 때인 1940년 서울 동양극장 내에 설립된 극단 <청춘좌>에 입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극단 <성군> <자유극장>과 라디오 성우를 거쳐 황정순은 1950년 극단 「신협」의 창단 멤버로 활동한다. 아버지 없는 작은 딸로서 귀하게 자랐고 몸이 약해 오빠에게 업혀 다닌 황정순이 그 험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극단 <신협>태생이다. 앞서 그녀를 평한 주선태 씨보다 2년 선배라니 관록으로 볼 때 당당하지 않을 수 없다. 「뇌우(雷雨)」에서부터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그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그녀는 유창한 대사로부터 넘치는 듯한 연기에 압도적인 제스처 등등으로 성격 배우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춥고 배고픈 것이 연기인의 생활이었음에서도 그녀는 예술을 사랑한다는 창의성에서 부단히 애써온 보람은 무대를 영화로 바꾼 「마의태자」에서 산 연기를 보여주었고 「사랑」에서 멋있는 연기 모습을 보이는 데 성공하였다. 무대인이 영화로 진출하였을 때에 저지르기 쉬운 허물일랑 연기가 생강하다뿐 아니라 액숀에 과장성이 많음을 지적받지 아니치 못하는 바에서도 황정순 양만은 오로지 그녀가 창의성에 찬 여성일 뿐더러 부단히 쌓아올린 연기력에 기인된 것이라는 것이다.”
황정순이 보인 연기자로서의 자세와 사람됨을 상찬하는 말이다. 연약했던 황정순이 연기자로서 집념과 노력이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계속해서 <경인일보>는 황정순의 귀향을 이렇게 그리면서 격려한다.
“이번 이런 황정순 양이 코 흘리던 시대의 꿈을 비저(빚어)주든 항도 인천에 금의 환향하야 팬들을 모시게 되었다니 아니 봐 줄쏘냐? 그리웁던 동고향의 그녀가 웃을 적에 샛하얀 잇새를 들어내 볼 터이니 말이다. 모쪼록 좀 봐 주세요!”
황정순은 우리나라 연극과 영화, 다시 말해서 무대 예술과 영상 예술의 초기 연기자요 마지막 남은 대모(大母)다. 이 분야에 있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역사가 아닌가.
출연한 수백 편의 연극과 영화는 물론 각종 영화제에서의 주·조연상, 훈장 등을 열거하지 않아도 황정순이 이 나라 연극계, 영화계, 예술계에 남긴 족적은 실로 대단한데, 그리고 온 국민에게 그녀가 남겨 준 영원한 한국의 주부상, 여성상은 앞에도, 뒤에도 누군가 다시 흉내 낼 수조차 없을 터인데, 그런데도 우리 인천의 영화사는 단 한 마디도 그녀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황정순이 인천에서 자라 한국 여성의 상징이 되었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천은 행운이고 복이다. 그러니 차분히 생각해 보자. 당장 생전에 이 대 배우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고, 앞으로 두고두고 기념할 일은 무엇인가. 이 대 배우의 해는 이제 거의 저물고 있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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