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인물

벽안의 최분도 신부

by 형과니 2023. 4. 9.

벽안의 최분도 신부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5-31 22:31:24

 

인천인물] 벽안의 최분도 신부

"섬주민 모두를 사랑으로 포용한 희생자"

 

 벽안의 최분도 신부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지난 2001330. 미국 뉴욕 메리놀 신학대학내 대성당에서 치러진 한 신부의 장례미사에 한국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수십명의 한인이 고인이 된 신부를 애도했고 인천의 한 주민이 추도사를 읊어 내려갔다.

 

고인은 '서해낙도(落島)의 슈바이처'였다. 수만리 이국땅에서 젊음을 다 바친 벽안의 천주교 신부에게 섬이 붙여준 이름이다.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난 미국 출신의 최분도(Benedict Zweber) 신부.

 

 

질병에 시달리는 도서민들의 순회 진료를 위해 미군 함정을 인수, 병원선으로 개조한 '바다의 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남서쪽으로 1시간가량 달리면 옹진군 덕적도에 닿는다. 여의도의 6배가 넘는 600만평 규모로 1천여명이 살고 있는 한적한 섬에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백색의 모래가 아름다운 서포리해수욕장 인근 노송(老松) 동산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최분도 신부 공덕비'.

 

1976년 덕적도 소재 서포1·2, 진리, 북리 주민 27명이 추진위를 구성해 건립한 공덕비 뒷면에는 최 신부를 기리는 업적이 상세히 담겨 있다.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이 낙도에서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는 물론 죽음과 생의 기로에서 헤매는 수많은 생명을 건져준오랜 세월을 두고 꿈에도 그려보지 못하던 전기시설을 갖추어 면을 골고루 밝혀 준 것은 너무도 엄연한 사실이며."

 

19596월 사제 서품을 받을 당시 27세의 최 신부는 메리놀 외방 선교회를 통해 한국 땅에서 선교사업을 펼치기로 다짐하고 자원한다. 한국과의 남다른 사연은 둘째 형에게서 시작됐다. 당시 미8군에 복무하던 친형은 19568월 여름, 한강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두 소년을 구출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던졌다. 고인의 모습에 감화받은 최 신부는 인천에서의 30여년 선교활동 중 고립된 섬에서만 14년을 거주했다.

 

 

'복자유베드로병원'에서 진행되는 수술때 최분도 신부(왼쪽 두번째)가 직접 확인하고 있다.

첫 주임 신부로의 부임지는 1962년 연평도이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보였던 섬은 5년 뒤 발령받은 덕적도. 최 신부는 여기서 종교 이상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음을 깨달았다. 섬이 준 두가지 '선물'은 바로 가난과 질병.

 

우선 질병에 시달리는 어민들을 위해 낡은 미군 함정을 인수, 병원선으로 개조해 '바다의 별'호로 명명하고 진료에 나섰다. '바다의 별'은 천주교에서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애칭 중 하나다.

 

섬을 순회하며 환자들을 돌보던 최 신부는 질병 퇴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해 병원을 세운다.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건립된 '복자유베드로병원'60개의 병상을 갖추고 진료분야도 외과, 내과, 산부인과, X-선 등으로 세분화시켰다.

 

 

서포리해수욕장 인근 노송 동산에 최분도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로서는 국내에서도 드물었던 현대 의료기구와 약품들을 미국에서 직접 들여왔다.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에서 후원을 받아 의사들의 파견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천주교 인천교구청의 기록에 따르면 최 신부의 의료 봉사 혜택을 받은 사람이 연간 입원환자 5500여명, 외래환자 12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낮은 문턱과 최신 진료시설로 주변 섬에서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단다.

 

병원을 찾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최 신부는 손수 약을 지어서 각 가정을 방문하기도 했다. '고난의 길'을 자처한 셈이다.

 

최 신부는 한 발 더 나아가 섬 전체의 개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100자가발전기 두 대를 미군에서 지원받아 설치했다. 손수 철근과 시멘트로 전주를 만들었다. 또 집집마다 전등을 설치해 편리한 생활을 누리도록 도왔다.

 

최 신부와 같이 활동했던 서재송(79)씨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원돼 하루를 꼬박 매달린 결과 온종일 전기를 가동해도 남을 정도였다""신부님은 눈병이 나는 등 고생이 심했지만 불평 한마디 없었다"고 회상했다.

 

최 신부는 영세한 어민들의 소득 증대 차원에서 23급 어선 3척을 구입, 무상으로 기증해 주민 스스로 협동조합을 구성토록 했다.

 

특히 잡는 어업이 부진함에 따라 양식업으로 전환이 가능한지 고민에 빠졌고 학계의 자문을 얻어 덕적도 일대가 해태() 양식의 적지임을 확인했다.

 

 

당시 서포1리에서 진행된 하천공사에 최분도 신부(오른쪽)가 주민들과 함께 팔을 걷어 붙였다.

곧장 시험개발에 착수했고 1970년 덕적도, 연평도, 영흥도에서 양식에 성공했다. 섬 주민에게는 생계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인근 도서에까지 이 방식을 보급했다. 고급 김으로 소문난 서해북부 김 탄생의 시초였다.

 

이때 서포1리는 매년 해변에서 밀려오는 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 고질적인 침수지역이었다. 지방정부조차 엄두를 못낼 정도였다. 주민들의 숙원사업에 최 신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1971년 추진된 하천공사는 순전히 주민들의 땀과 영국 구호단체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외국인 신부를 경계하던 주민들의 시선은 그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차츰 매료돼 갔고 미사가 있는 날이면 하나 둘씩 자발적으로 성당에 모여들었다.

 

당시 섬에 거주하던 1만여명 가운데 7천여명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섬 전체가 천주교 일색이었단다.

 

우리 정부도 그의 헌신적 노력을 인정했다. 그는 1971년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동백장(2)을 받았다.

 

오경환 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왜소한 체격을 지녔던 최 신부는 언제나 열의에 넘쳤었다""늘 어려운 이웃들에게 아낌없는 관심을 쏟았고 특히 혼혈아에 대해서는 가슴으로 감싸 안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오 교수의 언급대로 최 신부는 1천명이 넘는 혼혈아의 미국 입양을 주선했다. 섬 지역을 포함한 인천 전역엔 6·25 전쟁 직후, 미군과 한국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대부분 버려져 고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 부대에서 지원받은 100자가발전기를 수송선에서 내리기 위해 섬 주민들이 모두 매달렸다.

하지만 최 신부에게도 아쉬움은 남았다. 27만여평의 농지조성을 위한 서포2리 간척사업은 14년간 섬 생활을 뒤로하고 송림 본당으로 발령받으면서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시내에서 세 곳의 성당을 더 만들었고 1990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의료, 입양 등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앞서 19769월 최 신부는 당시 김태호 인천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전달받으며 진정한 '인천인물'로 거듭났다. 더욱이 역사편찬회가 1988년 발간한 '대한민국 5000년사, 한국인물사'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미국으로 발령, 신학생 육성에 매진하던 최 신부는 1997년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제2'한국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복합척수염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뉴욕 '성데레사 양로원'에서 끝내 눈을 감았다.

 

병상에서 남긴 최 신부의 글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내 고통은 러시아인들이 믿음을 위해 견디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19707월 발간된 잡지 '코리아 라이프(no.48)'는 덕적도 현지르포를 통해 최 신부를 '무지와 빈곤 쫓은 기적(奇蹟)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현장취재를 담당했던 한홍석 기자는 "몽매한 폐습과 가난에 쫓기던 덕적섬을 현대화시킨 최분도 신부, 섬 전체를 전화, 수도시설 등 문명화시켰다"고 적었다.

 

 

최신부와 함께활동한 서재송씨

20070516() 강승훈 shkang@kyeongin.com

 

서재송·인현애씨 부부.

"아픈 환자든 국적을 알 수 없는 혼혈아든 신부님은 섬주민 모두를 사랑으로 포용한 그야말로 살아있는 희생자였습니다."

 

최분도 신부가 인천에 머물던 40여년의 세월동안 바로 옆에서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서재송(79·세례명 비오)씨는 "하천공사, 전기공급 등 섬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에 신부님이 직접 뛰어들었다""허름한 작업복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연방 굵은 땀방울을 쏟아냈지만 안면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다"고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김 양식을 벌일 때에는 찬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솔선수범했기 때문에 어느 일터에서건 섬주민 모두가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고향 덕적도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서씨는 최 신부가 연평도 주임 신부로 활동하던 지난 1962년 첫 만남을 가졌고 백발이 된 지금까지도 고인의 생전 의지를 담아 고아와 혼혈아를 돌보고 있다.

 

서씨는 40년간 미국 입양만 2천여명을 보냈고, 부인 인현애(77·크리스티나)씨와 함께 입양아 친부모를 찾아주는 등 사후관리에 나섰다.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양로원에서 만난 신부님은 '비오'를 연방 부르며 아이들을 함께 돌본 그때가 너무 그리웠다"며 소외된 영혼들에게서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인천을 떠나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국내 현황을 자주 물어왔다"고 말한 서씨는 "신부님은 언제나 인천으로, 특히 서해 낙도(落島)로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너무 아쉽다"며 눈물을 훔쳤다.

 

서씨 부부는 최 신부가 선종한 지 나흘이 지난 2001329일 그 소식을 들었고, 곧장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생을 함께한 정신적 지주이자 동료였던 최 신부의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노부부는 장장 17시간을 달려갔다.

 

그리고 서씨는 장례미사에서 추도사를 했다. 최 신부가 숨을 거두자 메리놀 신학대학 총장은 서씨부터 찾았단다. 최 신부가 눈을 감기 전 그를 애타게도 찾았던 것이다. 대학측은 서씨가 오기를 기다려 장례시간을 반나절 이상이나 늦췄다고 한다.

 

 

 

 

'인천의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현육각 김석숭 보유자  (0) 2023.04.11
대금장 이정대  (0) 2023.04.10
장명덕 전도사  (2) 2023.04.09
초대 성공회 주교 코프  (0) 2023.04.08
길영희 선생 3.1운동 관련 판결문 발견  (1) 2023.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