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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대금장 이정대

by 형과니 2023. 4. 10.

대금장 이정대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5-31 22:55:35

 

굳은 대()에 천년의 숨결을 심는 손길

열정은 미친 짓이고 마약 같은 것, 후회는 안 해

 

<인천의 맥()을 잇는 사람들- 대금장 이정대>

 

 

내 몸을 다듬고 영혼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20년 외길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대금은 그 자신이고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2001년 인천시 무형문화재 9호로 지정된 이정대(48) 씨는 대금연주로 시작, 차츰 악기에 관심을 갖게 돼 훌륭한 대금장이 된 경우다.

 

대금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고려시대 이후부터는 모든 악기를 조율하는 표준악기였다. 일명 젓대라고도 불리는 대금은 팔음 준 죽부(대나무로 만든 악기)에 속하는 공명악기이기도 하다. 거문고와 함께 국악의 대표적인 악기인 대금은 표준제작방법이 없어서 제작하는데 상당한 인내와 절제를 필요하다.

 

우선 대금으로 쓰일 재료부터가 산삼만큼이나 귀하신 몸이라 구하기 힘들다. 일반 대나무보다는 쌍골죽이 최고인데 속이 꽉 차 원하는 크기로 내경을 뚫을 수 있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돌연변이 대나무인 이 놈은 1만그루의 대나무와 산 2개 정도를 뒤져야 찾을까, 말까한 것으로 보통 1주일씩은 산행에 나서야 한다.

 

요즘은 개발바람을 타고 대밭을 갈아 업는 추세인데다 힘에도 벅차고 돈이 많이 들어 직접 찾아 나서기보다 수집상을 통해 개당 20~30만원씩 구입하는 편이다. 이 보유자는 재료 구하기가 힘들어서 최근에는 중국, 네팔, 태국 등 대나무가 자라는 나라를 찾아다녔지만 열대지역 대나무는 물러서 못쓰고 중국 대는 모양이 좋지 못했다.”면서 결국 한국의 대나무가 가장 대금스런 모습과 재질을 갖추고 있다.”고 귀뜸했다.

 

어려움 끝에 수중에 든 쌍골죽은 숯불로 연하게 구워 진을 배고 대가 갈라지지 않게 묶은 후 1개월간 소금물에 절인다. 이후 2~3년간 그늘에서 말리고 곧게 펴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거친다. 간혹 부러지거나 변형이 생긴 놈을 버려야 할 때면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란다. 곧고 잘 마른 대나무가 준비되면 내경을 일정한 크기로 판 뒤 취구와 지공, 청공을 뚫는 작업이 이어진다.

 

지공 사이의 간격이 조금만 어긋나도 소리 차이가 크기 때문에 간격 오차는 모두 합해 2를 넘지 않아야 한다. 80길이의 대금에 구멍은 10여개. 모든 구멍의 위치와 크기는 악기음의 생명과도 같기에 섬세한 손 감각이 필요하다. 이것이 국내에서 대금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이 보유자뿐이라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온도변화에 민감한 대나무가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튼튼한 무명줄로 대금을 여러 번 칭칭 동여매고 내경에 기름칠을 하면 비로소 대금이 완성된다. 국악을 배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주문이 밀리지만 공급이 딸리는 형편이다. 1년간 계속 작업을 해도 20개 정도만이 대금으로 탄생한다. 그나마 10개 재료 가운데 최상품은 평균 2개 정도뿐.

 

이 보유자가 독보적인 대금 제작 장인이 되기까지는 혹독한 시련을 거쳐야만 했다. 인천 토박이인 이 보유자는 1984년 군대 제대 후 장래를 고민하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시절, 우연히 일본문화를 소개한 잡지를 보다 그곳의 전통문화를 소개한 글에 흥미가 끌렸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자취를 거의 비슷하게 쫒아가던 시절로 언젠간 우리나라에서도 전통문화가 각광받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면서 음악을 하는 형이 단소를 선물하면서 국악이란 것을 처음 접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가 한식날 부친의 묘소에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걸인이 틀어놓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단소소리를 듣게 됐다. 순간 이 보유자는 바로, 이거다!”라는 강한 충격을 받고 그 때부터 스승을 찾아 나섰다. 1986년 이 보유자는 드디어 악기가게를 통해 대금연주자 김정식 선생을 만나 대금의 세계에 입문했다.

 

제작을 위해서는 연주가 필수. 악기를 테스트할 능력이 있어야 좋은 악기를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연주만 5년간 연습했다. 그런 다음에야 조금씩 대금 제작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 보유자는 연주 능력 없이 만든 악기는 악기가 아니다.”그것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든 모형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좋은 직장 마다하고 장래성도 돈벌이도 보장되지 않는 국악을 한다하니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까지도 모두 손가락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회의 낙오자혹은 미친놈소리도 남의 말은 아니었다. 이 보유자 자신도 결핵에 걸려 각혈을 쏟아내면서까지 대금을 불 때는 내가 정말 미치기는 미쳤구나라고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병수발을 들던 어머니마저 아들을 나무라며 한탄하실 때에야 그는 죄스러운 마음 반, 대금과 무슨 인연이 깊어 이렇게까지 사서 고생하나하는 자책 반이었다. 최근 7~8년 전부터 국악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문화에서도 신토불이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입지가 다소 넓어진 게 다행스럽기만 하다.

 

결국 이 보유자는 뜻을 세운지 15년만인 2001년 대금제작자로는 처음으로 인천시 무형문화재가 됐다. “내가 대금을 한 것이 아니라 피 속에 무언가가 있어 대금으로 나를 이끌었다.”는 그는 힘들 때를 돌이켜보면 대금이 마약 같던 시절이어서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일상은 전수와 각종 공연활동, 제작 등으로 잔잔히 이어진다. 국악이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취미 또는 특기로 대금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 강습으로 생계를 꾸린다. 산고 끝에 완성해낸 대금도 주 수입원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건비를 보장해줄 방도가 없어 아직 전수자를 둘 형편은 못 된다. 본인이 아직은 젊다지만 나중이 큰 부담이 될 터이다.

 

이 보유자는 구월동 자택에서 공방을 운영하며 인천전통예술원연구원장, ()죽향회인천지회장, 설죽전통학교연구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인천전통예술원과 중동현대백화점문화센터에 강습을 나가고 있다. 또한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를 이수, 문화재청에서 인정받았다. 최근에는 전통문화 예술인 8명이 모여 ‘8인회를 만들었는데 막내격인 그가 번거로운 일들을 도맡으며 왕성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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