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덕 전도사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5-31 22:29:34
인천인물 100人]장명덕 전도사
농촌계몽운동 '상록수' 씨앗 심다
내가 한 일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선지 그의 행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근대 농촌계몽운동을 그린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하면, 소설 속의 실제 인물 최용신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이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잘 알지 못한다.
'상록수'에 청석학원으로 등장하는 '천곡학원'을 설립한 사람은 바로 장명덕(1901~1990) 전도사. 그의 숨결을 더듬기 위해 지난 18일 길을 나섰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 1번 출구로 나가 아파트 단지 쪽으로 500여를 더 가자, 과거 천곡교회였던 샘골교회가 보였다.
▲ 1988년도 세계복음화대성회를 맞아 여성분과위원회에서 만든 팸플릿 첫 표지의 사진(장명덕 전도사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
천곡학원으로 썼던 이 곳 예배당 강습소를 일제의 감시 속에서 운영했던 최용신을 기리기 위해 인근의 상록수 공원엔 그의 묘소가 있었고, 기념관 건립공사도 진행 중이었다. 천곡학원의 운영에 헌신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최용신은 여성기독교청년회(YWCA)에서 교사로 뽑혀 천곡학원에 보내졌다.
그 유명한 천곡학원이 장명덕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그가 1929년 수원지방 안산구역의 천곡교회로 파송된 뒤, 교회광고를 통해 30여명의 어린이를 모아 한글과 산수, 찬송가를 가르치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천곡학원은 시작됐다.
홍석창 목사의 저서 '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을 통해 천곡학원에서의 장 전도사의 역할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홍 목사는 '천곡 등지에서 장명덕 전도사의 노고와 성과는 대단했다.
카랑카랑하면서도 찌렁찌렁 울리는 듯한 큰 목소리 그리고 누구나 들으면 똑똑하다고 평할만큼 유창하고도 뚜렷한 말소리로 가,갸,거,겨, 1, 2, 3, 4를 가르칠 때면 마치 어린이의 머리를 열어 젖히고 쪽집게로 한자한자를 집어넣는 것과 같아, 배우는 어린이들은 한없이 쉽게 배웠다.
그래서 학부형들은 1년만이 아니라 계속 좀 가르쳐 주었으면 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밀러 선교사에게 전해지니 밀러 선교사는 안산구역 중에서 가장 성과가 좋은 천곡을 지정해서 모범적인 강습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장명덕 전도사야 말로 천곡학원의 터를 잘 닦아놓은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장 전도사를 평가하고 있다.
이런 그의 역할은 왜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 의문은 장 전도사의 외동딸 박미화(87)씨가 건네준 잡지를 보고는 금세 풀렸다.
1989년의 '주간 기독교'의 임병해 편집부장은 장 전도사를 직접 만났을 때의 첫 대화라면서 이렇게 적었다.
"만남과 대화는 얼마든지 좋지만, 세상에 알리거나 기사화하는 것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 정말 싫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 장 전도사는 자신이 해 온 일을 남에게 알리길 진정으로 꺼렸던 것이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숨은 곳에서 계몽활동을 해오는 한편, 일생을 교회의 전도활동에 바쳐왔다. 그의 전도활동의 흔적은 현재 '인천 창영감리교회 70년사'를 집필중인 오상철(72)씨를 통해서 찾을 수 있었다.
오씨는 "창영교회의 역사를 쓰던 중, 일제 말기에 장 전도사가 이곳을 다녔던 것을 알게 됐다"며 "1940년대 초 인천 화도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장 전도사가 일제의 교회 통폐합 압박으로 화도·내리교회로 통합되자, 친오빠가 장로로 있던 창영교회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해방 이후 통합돼 있던 교회들이 분리되면서 당시 창영교회와 통합돼 있던 숭의교회 교인 중 일부가 나와 인천 중구 신흥동에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옥에 신흥교회를 지었다"며 "장 전도사가 마침 신흥교회를 짓던 현장을 보고는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초기 설립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 1934년 5월께 인천 영화유치원에서 창영교회 교인들과 밀러 선교사의 귀국기념 촬영(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장명덕 전도사).
신흥교회는 후에 중앙교회와 합쳐져 명칭이 바뀌어 현재 인천 중구 율목동에 자리잡고 있는 성산교회가 됐다. 이곳에서 장 전도사는 초기 부인회장을 맡았고 4년여간 전도활동에 힘썼다. 여성의 사회생활이 제한돼 있던 당시로서 장 전도사의 활약상은 놀랄만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빨리 전해졌던 지역에서 자라왔고 그의 친오빠 장기진과 가족들이 그의 학업과 사회활동을 뒷받침해주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장 전도사는 지난 1901년 9월 19일 경기도 부천시(당시 부천군으로 기록) 소래면 무지리에서 1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이미 미국 선교사가 지은 흥업강습소가 있었고, 이곳에서 공부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14년 인천 영화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1920년께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박영식씨와 결혼하고 딸을 낳았고, 1922년 친오빠의 권유로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홍순탁 목사의 권유로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고, 수원의 삼일여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미국 여성 밀러 선교사의 요청으로, 1년 정도 이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을 했다. 그 후 서울과 경기, 인천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다가 1949년께에는 서울 흑석동에 여성 종교인들의 노후를 위한 안식처인 안식관의 책임업무를 맡게 된다. 이후 14년간 이 일을 하면서 헌신적인 종교활동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평소에 "다리품 팔아서 남들이 가기 전에 그저 길 하나 닦아 놓은 것 외에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까"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왔다고 한다.
각 교회를 다니며 종교활동을 해온 그는 바로 여성종교인 안식처인 안식관 306호에서 여생을 보내다 지난 1990년 9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마음을 깨끗이, 생각을 깨끗이, 말씀을 깨끗이, 생활을 깨끗이'라는 글귀가 항상 놓여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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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77] 인터뷰/ 장명덕 전도사 딸 박미화씨
2007년 05월 23일 (수) 윤문영 moono7@kyeongin.com
"어머니는 평소에 내가 세상을 떠나면 비석에 '하나님은 일생 동안 나를 사랑하셨다'라고 써 달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초동교회에서 만난 장명덕 전도사의 외동딸 박미화(87)씨.
현재 인천 창영감리교회에는 장 전도사의 친오빠 장기진씨의 손자인 장광수씨가 다니고 있었고, 그를 통해 박씨와 연락이 닿았다.
박씨는 "어머니는 일생을 교회에서 전도생활을 하시면서 보내셨을 뿐, 크게 내세울 업적을 말씀드릴 게 있을지 모르겠다"며 "어머니에 대한 자료가 이사 중에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와 관련된 것은 1989년 '주간 기독교'라는 20쪽의 얇은 잡지와 장 전도사 교회장 팸플릿, 장씨가 쓴 A4용지 두 장의 본인 이력서 정도였다.
박씨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 요청을 받고 찾아보니 그나마 이런 것이 집안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는 마음이 깨끗하시고 항상 기도하시는 분이셨다"며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서 인천의 화도교회를 함께 나갔던 것이나 천곡교회에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옆방에 최용신 선생님이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는 "어머니가 수원지방 교회에서 활동을 하는 기간 외삼촌(장기진) 댁인 인천에서 지냈는데, 그게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때까지였다"며 "그 후에는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해서는 남편과 함께 홍콩, 제네바 등지에서 생활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또 "아버지는 결혼한 뒤 곧바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신문사에서 일을 했다"며 "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한국에 왔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형제, 자매가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경인일보 취재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며 오후 예배를 보러 교회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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