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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1900년대 초의 사무소건축 ‘군회조점(郡廻漕店)’

by 형과니 2023. 4. 19.

1900년대 초의 사무소건축 군회조점(郡廻漕店)’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12-31 17:26:24

 

1900년대 초의 사무소건축 군회조점(郡廻漕店)’

손장원의 인천근대문화유산답사

 

 

인천시가 추진하는 예촌조성공사의 일환으로 건물 리모델링 공사를 하던 중에 한 일본인이 1902년에 세운 건물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해안동 12-2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에 대한 정확한 유래가 알려지지 않아 2000년대 초 이 건물에 입주해 있던 삼우인쇄소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던 차에 明治三十五年十一月十一日郡金三郞이란 상량문이 나타난 것이다.

 

상량문에 기록된 코오리킨자부로(郡金三郞)는 무역 및 해운업자로 쓰시마(對馬島) 이즈하라(嚴原)사람이다. 그는 인천 개항초기에 도항하여 무역 및 해운업에 종사했으며 일본우선회사 기선취급점을 겸하기도 했다. 코오리는 당초 1877년 부산으로 건너와 무역과 수화물 도매를 위해 코오리상점을 열었다. 상점이 번성하자 친동생인 이케다스케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그는 아직 개항하지 않은 인천으로 진출했다.

 

그는 1883년 울릉도 탐사선인 진세이마루(鎭西丸)으로 인천항해를 시도하여 인천항내에 출입한 선박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해운업을 시작하였고 갑신정변(1884) 때에는 그가 주도하여 부인 및 부상자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켰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근거로 1904년에는 인천일본거류민회는 그에게 감사패를 주기도 했다.

 

당시 인천에서 진출해있던 일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일본의 한국침략사업에 적극 협조했다. 청일전쟁이 당시 이운사 소속의 이운호가 인천에서 중국의 지푸(?)와 텐진(天津)을 운항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불리하다고 느낀 일본은 조선정부에게 배의 운항을 정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당시 이운호의 착발을 책임지고 있던 세창양행에 압력을 가해 일본 해군과 육군의 수송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일본우선회사에게 이운호를 대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창양행은 교전 당사국인 일본군의 수송업무를 맡은 우선회사에게 배를 임대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계약의 해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방편으로 일본은 민간업자인 코오리에게 이운호의 임대를 요청하여 형식적으로는 그가 임대한 것으로 꾸미는데도 참여했다.

 

군회조점(郡廻漕店)

 

 

인천사정(1892년 발간, 주역본 p.47,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에 따르면 그는 인천항 해안 일본거류지에서 군회조점(郡廻漕店)을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인천의 긴요문제(1903)에는 상호명은 군상점(郡商店)’, 업종은 해운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발간된 재한실업가명감(1904)에 기록된 그의 회사의 위치는 인천항 해안통이며 상호는 郡商店’, 업종은 여전히 무역업과 해운업이다.

 

이 당시 코오리는 인천미두취인소의 주식 51주를 가진 주주였으며 1904년도의 기록에도 여전히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후 그가 인천미두취인소의 이사에서 물러났는지 알 수 없으나, 이후의 기록에는 코오리란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코오리가 소유했던 재산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조계지의 필지별 소유자와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에서 발행한 토지조사부(1910~ 18년 사이에 작성)를 조사했다.

 

일본조계지의 필지별 소유자에는 코오리가 현재의 해안동 16-5번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기록에는 코오리의 동생인 이케다가 소유한 토지는 있으나 그가 소유한 토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인천수산주식회사(190712월 설립)는 총 1,500주의 주식으로 출발했는데 이케다는 50주를 소유한 주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기록은 없다.

 

또한 인천미두취인소와 관련된 1921년과 1923년의 기록에 이케다스케의 이름은 있지만 코오리의 이름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904년 이후 1923년경에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코오리보다 우리나라에서 사업수완을 발휘했던 사람은 그의 권유에 의해 조선어를 배운 그의 동생이다. 그는 1915년에는 나가사키현(長崎縣)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군회조점은 맞배지붕에 일식기와를 올린 벽돌조 2층 건물이다. 1900년대 초기의 사무소 건물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으며, 2층 창문상부의 아치장식이 돋보인다. 또한 상량문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이 건물의 건축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건물이다.

 

 

* 필자는 재능대학 인테리어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해반문화사랑회의 인천정체성 찾기 운동에 참여했고 문화재청이 지원한 근대문화유산 지킴이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오랜 준비 끝에 다시 쓰는 인천 근대건축’(간향미디어랩)이란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