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인천 백성'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1-28 18:10:55
불쌍한 '인천 백성'
미추홀 - 조우성 <객원논설위원>
조선 성종(1476) 때였다. 임금이 윤인(尹璘)을 인천부사로 정하자, 사간원 대사간 최한정(崔漢禎) 등이 아뢰었다. "수령은 백성의 부모이므로 그 재능이 있고 없음에 백성의 고락이 달려 있으니 어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윤인은 배우지 않아 학술이 없고 젊어 세상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민생의 이해를 알겠습니까? 더구나 인천은 큰 고을이므로 인구가 조밀하여 송사(訟事)가 바쁘니 바라옵건대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여 "근래 인천부를 맡았던 자가 잇따라 마땅한 사람이 아니어서 백성들이 시름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끊임이 없었는데 인천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고 직언을 올리니 임금이 곧 개차(改差)를 명하였다.
최한정의 말대로 인천 백성들은 죄가 없었으나 '위로는 사또 영감부터 저 아래 육방 관속에 이르기까지 토색질을 일삼았으니'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솥단지를 둘러메고 인근 산속으로 도망치기가 다반사였다.
그 가운데 특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은 전란 중에도 토색질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선조 때의 부사 김찬선((金纘先)은 "기민(飢民)을 침해하는 일이 끝이 없어 온 경내가 원망하였다"고 사서(史書)는 그의 포악을 기록하고 있다.
21일자 본보 1면의 톱 기사 제목이 '비리 잘 날 없는 인천시'였다. 시(市) 공무원들이 4백여년 전 인천부(仁川府)의 사또나 관속들이 저질렀을 법한 온갖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보도였다.
백년하청이라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세도(稅盜) 사건 후 개과천선했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고금(古今)에 불쌍한 '인천 백성'들이다./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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