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월곳-황형 장군의 선견지명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6 08:18:14
황형 장군의 선견지명
황형(黃衡 1459-1520)은 일찍이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했을 때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북쪽으로부터 여진족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마을을 소탕하였고 남쪽에서 대마도의 왜구들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삼포왜란 때는 중종 임금의 특명을 받고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연미정
그러나 황 장군은 무예에만 뛰어난 장군이라기보다는 문(文)과 무(武)를 아울러 갖춘 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나이 60이 넘어 이곳 강화도의 연미정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을 때였다. 비록 몸은 서울을 떠나 시골에 와 있었지만 항상 나라의 앞날에 대하여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틈만 있으면 연미정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곤 했다.
“태조께서 이 나라를 세우신 지 어언 2백 년, 그 동안 크고 작은 외적의 침략은 있었지만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바다 건너 왜구들의 잦은 노략질을 보니 언젠가는 큰 난리가 날 것만 같구나.”
하며 한숨을 쉬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황 장군은 결심했다.
“여태까지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아 온 이 몸 이제는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될 때이다.”
다음 날부터 황 장군은 날마다 콩을 맛있게 볶아 마을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그 콩을 나누어 먹인 후 대가로 어린 소나무를 바닷가에 옮겨 심게 했다. 그리고 가끔 아이들이 싫증을 낼 때쯤이면 황 장군은 늙은 몸으로 아이들과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해가며 소나무 심는 일을 계속해 갔다. 백발의 노인이 아이들과 함께 계속 나무를 심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황 장군님, 연세도 많으신데 지금 어린 나무를 심어 어디다가 쓰려고 하십니까?”
“내가 이 나이에 나라를 위해 할 일이란 이렇게 아이들과 놀면서 나무 심는 일밖에는 무엇이 있겠소. 두고 보시오. 아마 훗날 나라가 이 소나무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황 장군의 소나무 심는 일은 계속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쯤 솔밭이 수십 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70여 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는 등 온 백성은 왜군의 침략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이 서울을 다시 찾기 위한 준비로 강화도에 들어왔다. 마침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 배를 새로 만들고 정비하는데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그러나 난리중이어서 나무를 찾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고을의 한 노인이 김장군을 찾아왔다.
“장군님, 지금 장군님이 찾고 계시는 나무가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고는 황 장군이 심어 놓은 이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된 숲으로 안내했다. 김 장군은 소나무 숲의 유래를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아! 이는 ‘황공선견(黃公先見)’이로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 황공선견은 즉 황 장군이 전쟁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해 놓았다는 뜻으로 다른 말로 유비무환이란 뜻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황 장군의 선견지명은 조선의 큰 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왜구의 침입을 미리 내다보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보다 이미 수십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황 장군이 62세에 숨을 거두자, 이 소식을 들은 중종 임금은 크게 슬퍼하며 연미정 근처의 많은 땅을 내리고 그 부근에다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현재 강화읍 월곶리, 그가 살던 곳에는 그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서 있고 인근에는 그의 묘소와 사당 장무사(莊武祠)도 잘 단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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