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청의 역사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4-10 13:07:21
인천시청의 역사
아픈 과거 딛고 행정의 중심이 된 인천시청의 역사
인천시청의 역사는 인천 발전사와 궤를 같이 한다. 중구 관동시대에서 남동구 구월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도시 규모가 확대될 때마다 인천시정의 심장부인 시청도 모습을 달리했다.
인천토박이나 인천에서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한 공무원들은 시청이 중구 관동 1가 9번지에 자리잡고 있었던 관동시대를 기억한다. 일제시대의 건축양식이 곳곳에 묻어나는 것은 물론 현대 건축물과 확연하게 다른 내부설계가 시간의 역류를 느끼게 하는 옛 시청 건물.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중구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의 역사는 인천의 '개화기'인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이 개항되자마자 일본은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의 영사관을 준공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해 청사로 사용했다. 1910년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인천 중구청 자리이다.
인천개항이 필연적이라고 판단한 일본은 인천에서의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1882년 4월께 지금의 중구 중앙동 1가 옛 조달청 인천사무소 자리에 2채의 가건물을 짓고 영사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후 일본은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양식 2층 목조 건물을 지어 1883년 11월 정식적으로 영사관을 개설했는데, 영사관 구내에는 부속경찰서와 감옥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어 일본은 1906년 2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했다가 1910년에는 인천부청으로 확대 개편했다.
이 건물은 1932년 철거됐고 이듬해인 1933년 철거된 자리에는 새 건물이 들어섰는데, 바로 이 건물이 시청에 이어 중구청으로 사용되는 인천 행정의 '메카'다. 당시에는 시청을 중심으로 많은 관공서가 밀집해 있었는데 '관동'(官洞)이란 지명의 유래를 이같은 지역적 특성에서 찾는 이도 있다.
신축 당시 부지 8천1백49㎥에 별관 포함 연면적 4천33㎥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이후 50여년간 수차례에 걸쳐 증축을 거듭해 6천4백59㎥로 늘어났다.
한편 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 인천우체국 등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반면 이 건물은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있다. 사적 2백87호인 '성바오로 대성당'(현 답동성당)의 착공시기가 중구청사 착공시기 보다 10여년 후인 1894년인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 이는 건물이 관공서로 사용되기 때문에 굳이 문화재로 지정을 하지 않아도 보호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건물이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현대 건축가들도 감탄할 정도로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지어졌다는 점이다. 중구청의 한 공무원은 “날씨가 추울 때 춥지 않고 더울때 덥지 않은 건물이 바로 중구청 건물”이라며 “보수공사를 할 때 벽체의 두께가 무려 50㎝에 달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건물은 TV드라마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얼마 전에는 모방송국의 드라마 '고개숙인 남자'의 세트로 활용되기도 했다.
위치: 인천광역시 중구 중구청길100
(관동 1가 9번지)
현재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있는 건물로 근대건축물을 나타내는 모범이 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곳은 일본영사관자리에서 인천부청, 인천시청에서 오늘날 중구청으로 1932년에 지은 건물에 1층을 더올려 3층으로 되어있다
이 건물에 '인천시청' 간판이 걸린 것은 1949년. 그해 8월15일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천부가 인천시로 개칭되면서 새 간판을 달게 된 인천시청은 행정체제를 정비, 본격적으로 인천의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점차 사회가 안정되어 가고 인구도 급격히 증가, 시행정 업무량이 폭주함에 따라 '출장소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는데, 인천지역에는 중부·북부·동부·남부·주안·부평·서곳·남동·문학출장소등 모두 9개의 출장소가 설치됐다. 이 시기에는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인천시지방의회가 구성, 5·16으로 해산되기 전까지 의정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어 1968년 인구가 55만명으로 팽창,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전국 4대도시로 부상한 인천은 구제(區制) 실시로 다시한번 행정체제의 대변혁을 맞게 되며 이후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고도의 경제성장 등으로 1981년 7월1일 직할시로 승격한다.
인천시에 구월동시대가 열린 것은 1985년 시청이 구월동 청사로 이전하면서부터. 허허벌판이던 구월동에 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면서 인천시는 구월동 1138번지 6만8천6백96㎥를 확보, 1983년부터 3년 동안 시청사 신축공사를 벌여 1985년 12월9일 새청사를 개청하게 된다. 새청사의 규모는 지하2층, 지상 4층에 연면적 2만4천7백74㎥.
새 청사가 들어선 구월동(九月洞)은 당초 '龜月'이란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이 거북이 등과 같이 능원이 지고 또한 마을 언덕이 반달(半月)과 같이 휘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구월동 일대는 시청이 들어선 이후 '붉은고개' 등 일명 판자촌이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했다.
증축공사로 새청사의 규모도 확대되는데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1991년 11월19일에는 시청사 동쪽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5천8백74㎥ 규모의 시의회 청사가 준공된다. 또 1993년 11월에는 민원인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지하 1층, 지상 4층에 연면적 4천8백5㎥ 규모의 민원동이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의 옛모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 사립 영화학교 (0) | 2023.04.29 |
---|---|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 운동장 (0) | 2023.04.29 |
한국최초의 호텔 ‘대불’ (1) | 2023.04.24 |
100년 前 인천 (0) | 2023.04.23 |
추억 속에 묻힌 '꼬마열차' - 수인선 (1) | 2023.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