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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 운동장

by 형과니 2023. 4. 29.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 운동장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6 06:44:09

 

인천의 근대시설(10)

-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 운동장-

 

문상범 제물포고등학교 교사

 

#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

 

 

인천 교육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제물포고등학교 자리는 교육 이전에 인천 체육 중심지 역할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자리에 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인천공설운동장 역할을 했던 웃터골 운동장이 있어 인천 체육의 발원지라는 의미를 지닌다. 웃터골 운동장의 이름은 자유공원에서 기상대로 돌아가는 응봉산 분지를 옛 인천시민들이 웃터골이라고 불렀기에 붙은 것이다. 웃터골은 시내 어디서 보아도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이 골짜기가 높아보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웃터골 운동장은 1920111일에 일제에 의해 기부금 5250원의 예산으로 7798(2363)의 터에 준공됐다. 당시 주소로는 부내면(府內面) 산근정(山根町) 26번지였다. 이 자리는 원래 국유지로 골짜기 전체가 작은 소나무 숲이었으나, 러일전쟁 당시 철도감부(지금의 철도청)의 합숙소가 됐다가 인천부 소유가 된 후 공설운동장이 됐다.

 

이곳은 솔밭 골짜기에 삼태기 모양의 넓은 분지가 펼쳐져 있어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혜의 체육시설이었다. 넓은 분지는 천연의 운동장이 됐고, 완만하게 경사지고 녹음이 푸르른 삼면의 기슭은 천연 스탠드 구실을 했다. 편의 시설은 수도꼭지 몇 개와 변소만 있었을 뿐 여타의 시설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어느 곳보다 먼저 인천에 운동장이 만들어진 것은 한 해 전에 일어난 3·1운동의 영향으로 이후 일본이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신문발행과 사회단체조직설립 인정 등 일련의 유화정책을 취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근대 스포츠가 인천항을 통해 신문물 보따리와 함께 들어와 야구, 축구 등 구기 종목이 선교사나 무역상사원들에 의해 전국 각지로 빠르게 전파되는 과정에서 인천은 이 땅에 근대 스포츠를 전하는 교량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산파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천의 관청, 은행, 미두취인소, 학교에 체육 클럽이 생겨나고 스포츠 붐이 일면서 인천부는 조선체육협회와 용산철도 야구부의 협조로 토목기사를 초청해 웃터골을 고르게 닦고 넓혀 운동장을 만들어 인천 최초의 공설운동장이 생겨났다. 이어 일제는 이용자가 늘자 1926년에 공사비 1만 원을 들여 21285(6450)로 확장했다.

 

# 한용단의 야구경기와 청년운동

 

 

웃터골 운동장은 1920년에서 1934년까지 15년간 인천공설운동장으로 쓰였다. 각종의 야구, 축구, 육상 경기는 물론 각 학교의 대운동회가 연중 열려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인천 대표팀과 일본 수병, 미국상선 선원과의 야구경기, 상하이 유학생과의 축구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인천의 기차통학생들이 주축이 된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의 웃터골 운동장에서의 활약은 유명했다. 한용단과 미두취인소 소속 미신(米信) 팀의 라이벌 야구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이 일대는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고일(高逸) 선생은 인천석금인천 청년 운동의 발원지는 웃터골이다. 인천 시민에게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의 묘목을 심었으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 바로 웃터골이다라고 썼다.

 

인천 한 세기저자 신태범(愼兌範)박사는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어렸을 때 웃터골에서 애를 태워 가며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믿음직한 한용단 선수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놓고 야구의 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열병에 들뜬 것처럼 웃터골로 모였다고 회상했다. 특히 어른들은 빈 석유통을 두드려 가면서,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으로 마음껏 떠들어댔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지게를 세워놓고 구경하다가 조갯살과 생선을 썩혀버렸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주민들은 그때나마 소리를 질러가며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한을 풀어 버렸던 것이다.

 

인천 청년들의 기개와 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웃터골운동장은 1934년에 도원동에 공설운동장이 건립되고 이듬해 이 터에 인천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도원동에 공설운동장이 건립됐지만 웃터골 운동장에서는 제1회 전인천농구대회 등 각종 경기가 열렸다. 이와 별도로 1920년 중반에 월미도에도 공설운동장이 건립돼 주로 정구와 씨름대회가 치러지곤 했다.

 

한용단은 漢勇團組織 인쳔의 년들이 모듸여 심신을 단련?기 위???과 풋?을시작?엿다’(매일신보, 1919.11.13.)는 기사에 나타난 것처럼 심신을 수련하는 친목단체였다. 그러나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었던 점은 한용단의 어머니격인 친목회는 인천의 문학청년을 아들로 탄생했으니 운동 경기를 외피(外皮)로 한 그 핵심은 민족 해방정신을 내포한 문학운동으로 전개했었다는 고일(高逸)의 회고와 작년 봄에 셰워그 당시에 만세소요로 인?요한 임원들은 모다 창 아?예 갇혔다는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 웃터골, 인천 교육의 메카

 

 

웃터골이 일제강점기 인천인들이 나라 잃은 울분을 체육을 통해 해소했던 역사적 장소였다면,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인천 교육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제물포고등학교를 탄생시켰던 교육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응봉산 자락이 감싸고 있는 제물포고등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자 인천 토박이들의 추억의 공간인 자유공원을 마주하고 있고, 우리나라 근대기상 업무의 시원지이며 한때 우리나라 중앙기상대 역할을 하기도 한 인천기상대를 뒤로 하고 있다.

 

제물포고등학교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인천지역의 교육을 이끌어오며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온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학교다. 1935년 인천부립중학교(인천중학교 전신)로 개교하고, 광복 후에 3·1 독립투사요, 민족교육자인 길영희 교장과 인천중학교 졸업생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95466000(2만여 평)의 대지에 6개 동의 건물을 세우며 설립되어 유한흥국(流汗興國), 위선최락(爲善最樂)’의 정신과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육이념을 바탕으로 올바른 인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매진해 왔다.

 

특히 개교 당시부터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아름답다.”라는 선서를 하며 일체의 허식을 버리고 오직 양심에 따른 자율을 지향해 우리나라 초유의 무감독 시험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무규율부 제도, 학생 주관 월례조회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가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등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인성 중심 교육 속에서도 6·25전쟁으로 페허가 된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 양성 교육도 강화해 주요 명문대학교 전체 수석 및 단과대 수석을 무더기로 차지하고 많은 합격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보이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런 노력으로 짧은 역사 속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명문고로 부상했다.

 

응봉산과 웃터골, 그리고 제물포고등학교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을 사는 젊은 학도들이 이 공간이 갖는 인천 역사 속에서의 의미를 잊지 말았으면 싶다.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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