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근대 초등교육, 사립 영화학교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6 06:45:16
인천의 근대교육시설(11)
-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 사립 영화학교 -
문상범 제물포고등학교 교사
2007년 9월 1일 현재 인천의 학교 수는 초등학교는 공립 215개교·사립 5개교·국립 1개교로 합계 221개교이고, 중학교는 공립 108개교·사립 11교로 합계 119개교이며, 고등학교는 공립 73개교·사립 31개교·국립 1개교로 합계 105개교다. 여기에 특수학교 6개교, 고등기술학교 2개교, 각종학교 1개교를 더하면 총 454개교에 이른다. 인천에 이렇게 많은 학교가 있나 하고 놀라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나, 이는 인천이 수도권에 위치해 중요 지역으로 전입 인구가 많았고, 인천의 광역화로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돼 온 결과다.
# 선교와 근대교육
인천의 변화와 성장은 인천의 개항과 밀접하다. 인천은 강화도조약 체결로 부산,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되며 외세의 각축장으로 변모됐고, 한편으로는 갖가지 새로운 서양문물이 유입되는 첫 관문이 됐다. 이로 인해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많은 기록을 가진 곳이 됐고, 교육 분야 또한 그 중의 하나다.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기독교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교육사업과 의료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인천지역 근대교육의 시발점이 됐다. 즉 내리교회의 미국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hns, 한국명 : 趙元始) 목사는 1893년 3월 12일 영화학당을 설립해 남학생들을 교육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로 기록된다.
영화학교의 초창기 명칭은 1904년 세워진 교사의 현판에 ‘BOYS, DAY SCHOOL’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매일소년학교’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永化)’라는 이름은 안골예배당(내동예배당) 건물을 빌려 수업하던 영화학당 시절에 한문을 가르치던 박용래가 지은 것으로, ‘영(永)’은 영생(永生)을 의미하고 ‘화(化)’는 바른길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영화학교는 여러 번 경영난에 봉착했는데, 동아일보 1936년 4월 18일자에는 “인천 영화보통학교가 경영난을 이유로 5·6학년생을 무기 휴학시키자 학부형회가 반대하다.” 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광복 이후에도 경영난을 겪다가 1970년 폐교됐다.
# 근대여성교육의 시작
한편, 1892년 4월 30일 존스 목사의 부인(Mrs. George Heber, Jones) 또한 자기 집에서 한 명의 여아를 데리고 신식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현재 영화정보산업고등학교와 영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영화여학당의 시작이었다. 영화여학당은 1900년 4월 2일 존스 여사의 집에서 안골예배당의 뒷방으로 옮겼다. 이때 학생은 7명이었다. 1902년에는 미국인 카루렌이 희사한 돈 1천 달러로 싸리재(경동131번지)에 대지 396㎡(120평)을 구입, 벽돌 교사를 짓고 1903년 9월 30일 이사했다. 그때 학생은 47명이었다. 1909년 여름에 미국인 카루렌이 다시 1천 달러를 희사해 싸리재의 학당 대지와 교사를 팔고 합쳐서 쇠뿔고개(牛角洞, 현 창영동)에 대지 4천46㎡(1천226평)을 구입하고 2층 교사를 1911년 건축했다. 현재 영화초등학교 본관은 초기 건축에 1954년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 이외에는 원형이 그대로 잘 남아있어 인천시 지방 유형문화재 39호로 지정돼 있다.
# 인천의 여러 초등교육기관
인천에는 영화학교 이외에도 여러 초등학교가 설립됐다. 사립학교로는 박문학교와 동명학교가, 공립학교로는 창영초등학교, 신흥초등학교, 축현초등학교, 송림초등학교 등이 설립돼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박문학교는 천주교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를 대상으로 초급과정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기독교 전도에 힘쓰던 속칭 ‘천주학방’이 발전해 1900년 9월 1일 답동의 현 가톨릭회관 자리에서 인천항사립박문학교로 개교됐다. 김교원(金敎源)과 강준우(姜準雨)가 설립했으나, 1909년 3월 프랑스 신부인 전학준(全學俊, Eug. Deneux)을 설립자겸 학교장으로 변경했다.
1914년 6월 여자부가 설치되고 여자부 교사 6학급이 신축됐고, 다음해 6월에는 남자부 교사 6학급이 신축됐다. 1917년 두 학교를 합병해 인천박문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전학준 신부가 설립자 겸 학교장이 됐다. 2000년 9월 1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2001년 9월 1일 연수구 동춘동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했다. 2007년 2월 제82회 졸업식을 거행한 박문초등학교가 오늘의 명문이 되기까지 전학준 신부와 임종국 신부 등 역대 답동성당 신부들의 노고가 컸다. 이곳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사회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고(故) 장면 박사를 선배로 두고 있는 것은 이 학교의 자랑이다.
동명학교는 인천 노동자 야학의 등불이었다. 1931년 동명학원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지면서부터 일제 강점기에 적잖이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천의 대표적 민족학교인 동명학원은 박창례를 중심으로 결성된 관서야학을 근간으로 한다. ‘동명(東明)’이란 이름은 고구려를 개국한 동명성왕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식과 민족교육의 산실 역할을 한다는 의미였다. 광복이 되면서 학생이 급격히 증가해 기존의 공간(198㎡)은 너무 비좁아 1946년 종두제조소로 사용했던 건물을 불하받아 이전했다. 이곳이 지금의 동명초등학교다. 1997년 이전만 해도 동명초등학교의 일부 교사로 사용했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흔적을 좇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신축돼 과거의 종두제조소나 동명학원의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신흥초등학교)는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다.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어나며 자녀 교육의 필요성이 커져만 갔으나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한 시설이 없었다. 이에 1883년 동본원사 인천별원의 승려들이 일본인 자녀 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인천신흥초등학교의 전신인 심상소학교(인천공립심상소학교)의 출발이다. 1885년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1890년 관동 1가 8번지 일대의 가옥 및 토지를 구입해 교사를 새로 지었다.
1908년 신흥동에 교사를 새로 지어 옮겼다. 1913년 9월 고등소학교와 병합해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복 후 1946년 3월 15일 인천신흥국민학교로 개교하고 그 해 7월 48명의 졸업생들을 첫 배출하면서 인천의 명문 초등학교로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비록 일본인의 손에 처음 세워졌지만 우리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지금까지 왔고 이제는 글로벌 시대에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인천공립심상소학교(축현초등학교)는 1919년 4월 창립됐다.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취학 학생이 계속 증가하자 용강정(인현동) 부지에 공립심상소학교를 설립했다. 1919년 3월 25일 교사를 준공해 4월 1일부터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 학생 659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학교로 출발했다. 광복 후 1946년 9월 인천축현공립국민학교로 바뀌었다. 2001년 3월 1일 연수구 옥련동 405번지에 새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고, 이 자리에는 학생교육문화회관이 들어섰다.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는 순수 민족자본으로 1907년 4월 3일 관립 인천일어학교 안에 임시교사를 설치하고, 5월 6일 학생 3명으로 개교했다. 그 해 6월 사립 제녕학교를 병합하면서 74명의 학생을 받아들였는데, 계속 학생들이 늘어나 12월 20일 우각현(현 창영동)에 목조 건물을 세워 이전했다.
1910년 3월 26일 첫 졸업생 18명을 배출했고, 1912년에 이르러는 학생 수가 348명에 달했다. 같은 해 사립 인명학교를 통합해 여자 학급을 신설했다. 또 인천공립간이상업학교가 부설돼 7월 18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1941년 4월 1일 국민학교령에 따라 인천창영공립국민학교의 이름을 갖게 됐다. 본관 건물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현재 인천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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