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기독교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6 06:47:13
인천의 근대종교시설(1)
- 인천의 기독교 -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
인천과 강화지역에는 천주교가 일찍부터 전래됐다. 한국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 선대의 세거지가
▲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
인천이며 그는 참수된 후 반주골(현재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에 묻혔다. 또 그의 아들 택규와 신규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역시 천주교도라는 명목으로 참형당했다. 황사영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도 강화읍 월곶리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미 17세기 초엽부터 천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한역(漢譯) 서학서(西學書)를 통해 서학의 과학기술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사상과 조선의 전통문화와의 접촉은 거의 2세기에 걸쳐 진행돼 왔고,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문화접촉과정을 거친 후 천주교 신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서학에 관한 당시 실학자들의 관심은 일차적으로는 한역 서학서에 포함된 과학·기술적인 내용에 집중된 것이었지만, 서학연구가 계속되면서 필연적으로 서학이 담고 있는 종교·윤리적인 내용에 대한 연구도 수반하게 됐다. 18세기 후반에 서학에 대한 관심은 천주교에 대한 신앙으로 발전했고 1783년 동지사행을 따라 청에 간 이승훈(李承薰)은 북경에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했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을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면서 친척과 친지들에게 전파했으며 서울 김범우(金範禹)의 집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발족시켰다. 한국 천주교 교회의 기원은 이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정조 8년(1784)부터 시작된다.
인천 기독교 역사는 한국 최초 영세인 이승훈 일가로 시작됐다. 이승훈이 인천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그의 4대조 이태석이 당쟁을 피해 인천 반주골(장수동)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이다. 이승훈이 태어난 곳은 서울 서대문 밖 반석골(중림동)이나 주로 성장한 곳은 경기도 광주였다. 그렇지만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곧 신유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그 아들이 3일 만에 시신을 거두었으나 망나니의 큰 칼에 떨어진 머리를 찾지 못한 채 몸만 찾아 인천 반주골(장수동)에 묻었다. 그래서 ‘목없는 묘’라 불렀다.
개항 이전 인천지역에서는 이미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면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신규(李身逵)의 전도활동이었다. 그는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곧 신유박해) 때 처형당한 이승훈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묻힌 반주골에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1837년 조선교구 주교로 임명돼 들어온 엥베르(Laurent Marie Joseph Imbert, 范世亨)가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할 때 늦은 나이에도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신규는 엥베르 주교의 종복으로 선택됐고,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 성직자를 다시 규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천주교는 단순히 새로운 신앙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조선 정부의 탄압, 즉 이른바 신유박해(1801년)와 을해교난(乙亥敎難·1825년), 정해교난(丁亥敎難·1827년),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년), 병오교난(丙午敎難·1846년) 그리고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선 정부가 취했던 입장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천주교인들이 강상지죄(綱常之罪)를 범했다는 것이다. 강상(綱常)은 유교적 전통 규범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종교라는 관점에서 탄압한 것이 아니라, 유교 윤리와의 충돌에 대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정책적인 단죄였던 것이다.
조선의 개항은 천주교가 전교(傳敎)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됐고, 서구 열강들과의 조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프랑스와의 조불수호통상조약 협상은 미국이라든지 영국·독일·러시아 등의 경우와는 다른, 종교적인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돼 조약체결 자체가 늦어지게 됐다. 조선과 프랑스와의 관계는 프랑스 선교사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데, 1866년 병인박해 때 9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되는 사건으로 조선과 프랑스가 무력 충돌을 벌인 병인양요가 직접 개입돼 있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확보됐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조약 그 자체로서 조선에서의 신앙과 전교의 자유가 보장됐던 것은 아니다. 조약문 제9조 2항에 있는 ‘學習或敎誨 語音文字格致律例技藝者 均得保護’라는 문장에서, ‘교회(敎誨)’라는 단어는 다른 국가와 체결한 조약문에는 없는 것이다. 그 뜻은 ‘가르쳐 깨우친다’는 의미인데, 전체 문장의 해석은 “종교적으로 가르치고 깨우치는 천주교 신앙을 균득보호(均得保護)한다” 곧, 천주교 신앙을 고루 보호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천주교뿐만이 아니라 개신교까지도 전도와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게 됐다.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조선교구장 블랑(Blan : 한국명 백규삼)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했다. 그리고 페낭 신학교에 있는 빌렘(Jaseph Wilhelm : 한국명 홍석구) 신부를 인천 초대 본당(당시 성바오르성당) 신부로 임명했다.
1889년 7월 1일 인천에 부임한 빌렘 신부는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답동 언덕에 1만599여㎡(3천212평)의 부지를 마련해 성당 건축 정초식(1890년 7월)을 갖고 주변의 토지를 매각해 본격적인 건축에 힘썼다. 이 땅은 원래 시유지로 당시 인천감리였던 민선훈(천주교신자 : 요셉)이 기부하는 형식으로 25냥에 넘겼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성당 건축의 기초만 이룩한 채 그 해 11월 용산신학교로 전임되는 바람에 성당의 신축은 일시 중단됐다. 후임으로 제2대 신부인 르비엘(Emile Leviel : 한국명 신삼덕) 신부가 매입해둔 대지에 경리부 건물 1동을 고종 28년(1891)에 건립하면서 이곳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
1893년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에게서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됐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이렇게 탄생한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은 990여㎡(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성전으로 인천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교회의 상징물이었다.
그 후 답동성당은 광무 8년(1904) 4월에 제4대 본당 신부로 임명된 드뇌(Eugene Deneux : 한국명 김학준) 신부가 1933년 4월 성당 개축 공사를 시행해 4년2개월인 1937년 6월 30일 연건평 1천여㎡(307.2평)을 준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반주골 이승훈 묘터(1981년 경기도 천진암 성지로 묘소가 이전해 현재 묘는 가묘임) 인천 만수동에는 이신규의 부친인 이승훈의 묘가 있었으나, 한국 천주교 발상지라고 하는 경기도 광주 천진암 일대의 성역화 작업 일환으로 그곳으로 옮겨갔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인천의 옛모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05년 제물포항 (0) | 2023.04.29 |
---|---|
인천의 기독교(2) (0) | 2023.04.29 |
인천의 근대 중등교육 (0) | 2023.04.29 |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 사립 영화학교 (0) | 2023.04.29 |
인천 체육의 산실 웃터골 운동장 (0) | 2023.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