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덕(韓奉德) 화백과 인천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19 09:07:36
한봉덕(韓奉德) 화백과 인천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 한봉덕 1957년 기사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 최초의 순수 미술인 단체로 <인천미술인 동인회>라는 그룹이 탄생되었다. ‘세루팡’이라는 다방에서 모임을 가진 창립 동인은 이건영(李建英), 최석재(崔錫在), 김순배(金舜培), 김찬희(金燦熙) 등이며 임직순(任直淳), 김기택(金基澤) 등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는 별도로 <인천미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 회원은 서양화에 박응창(朴應昌)·김학수(金學洙)·우문국(禹文國)·김찬희·이명구(李明久)·윤기영(尹岐泳)·한봉덕(韓奉德), 서예에 류희강(柳熙綱)·박세림(朴世霖)·장인식(張仁植), 미술평론에 이경성(李慶成) 등이다. 해방 후 인천화단을 형성하는 모체로서 이들 단체가 출범하기는 했으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와해되는 실정이었다.”
“중앙 화단에서의 회원 단체 양분화 사태는 인천화단에까지 어김없이 파장을 몰고 왔다. <대한미협>에 반발하는 일부 미술인들이 별도로 <자유미술동인회>를 결성하여 여기 맞섰는데 회원으로는 김기택, 안현주(安賢周), 이달주(李達周), 이일(李一), 한봉덕 등이 가세하고 있다. 정부의 예술단체 일원화 방침에 따라 앞의 단체들은 1954년 <인천미술협회>(1961년에 <한국미술협회 인천지부>로 개칭)로 통합되었는데 새로 영입된 회원으로는 박영성(朴瑛星), 황추(黃秋) 등이 있다.”
이 두 인용문은 『인천시사』에 나와 있는 서양화가 한봉덕에 대한 기록이다. 기록이라고는 했지만 구체적인 화단 활동이나 그의 화풍, 전시 경력 같은 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채, 해방 후 초기 인천 화단 형성 과정에서 한봉덕이 가입한 미술단체 두 군데만 언급이 되어 있을 뿐이다.
노석(老石) 한봉덕(1924~1997)은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만주 신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중앙회화연구소 회원이 되었다는 어느 백과사전의 기록이 보인다. 그 백과사전은 또 그가 인천공업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거쳐 1947년 평양미술연구소 미술 담당 교수 등을 지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런데 『인천시사』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1946년 무렵 이미 그는 <인천미술인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1945년 10월 10일에 창립된 <대한미협>에 반발해 일부 미술인들이 <자유미술동인회>를 결성했다고 『인천시사』는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인천에 와 있었던 시기는 적어도 1945년이나 1946년 무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 뒤 이내 다시 평양으로 가서 평양미술연구소 미술담당 교수 같은 직책에 있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4후퇴 때 월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추리해야만 그 백과사전의 기록과 『인천시사』의 기록이 서로 치차(齒車)처럼 순서가 맞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 보문사석굴암을 조성한 한봉덕화백
아무튼 한봉덕이 어떻게 해서 인천에 오게 되었는지, 우연히 인천공업고등학교 미술교사가 되었기 때문인지, 그 배경이나 연고에 대해서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또 월남 후 잠시나마 다시 인천에 체류했었는지, 그대로 서울로 직행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면 앞에서 말한 해방 이후, 2년 내외의 짧은 인천 체류가 전부인 셈이 된다.
아쉬운 것은 그가 인천에 체류하던 동안 남겼을 법한 작품들이나 기록, 전해오는 인간적인 단면조차도 전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가 재직했었다는 인천공업고등학교 교직원 명부를 확인해 보거나, 생전의 왕성했던 작가 생활을 세밀히 살피는 과정에서 인천과의 관계를 혹 희미한 대로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
남다른 것은 그의 미술 활동이 대단히 왕성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자신 매우 독특한 미술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959년에 있었던 그의 개인전에 대한 이봉상(李鳳商)의 당시 작품평 「造形의 試圖」를 보자.
“<전략> 새로운 현대에의 전이(轉移)를 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작품 「군계(群鷄)」를 위시하여 「백로(白鷺)」를 주제로 한 화면, 그리고 「정물 A, B, C」인물 등에는 역력히 이러한 자취가 보이며, 현실에서 해탈을 꾀하는 조형적(造形的)인 추구를 가져온 것도 같다. 이 조형 의식이야말로 씨(氏)로서는 획기적인 좋은 현상이라고 보았으나 여기에 따르는 색(色)의 효과가 다채롭기는 하나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여 다소 산만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조형적인 내면 추구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음은 유감이라 하겠다.
여기에 비하여 「교회」 「교회 가는 길」등은 낭만성을 엿볼 수 없어도 현실을 파고들어 거기에서 빚어 나온 나이브한 추상이며 이것이 조형에의 환희를 말하여 주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것이 씨의 생리에서 나온 자연스런 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씨의 작품을 보고 나서 새로운 비약과 발견을 가져오려고 애끊는 듯한 태도에 공감을 가질 수 있고 앞으로의 발전이 믿어지는 것이나 좀 더 신중한 태도로 현대라는 것의 고민을 직시하여 가면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씨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스스로 느끼며 씨에게 기대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조형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조형성을 찾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작품-산
끝으로 씨의 작품 발표가 조형에의 시도(試圖)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들의 경구(警句)가 될 것을 믿으며 이것을 계기로 또한 전진과 발전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무렵은 한봉덕이 삼십 초반의 나이였으니까 아직 원숙한 경지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의 작품의 특징인 조형성에 대한 비평이 눈길을 끈다.
뭐니뭐니 해도 그가 한국 화단에 끼친 공로는 1950년대 말 한국 현대미술 문화 운동의 중요한 이벤트가 된 조선일보 현대 작가 초대전을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7년여 동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와 함께 현대 작가 초대전 심사위원을 6년간 역임하기도 하는 것이다.
▲ 작품-새우
1972년부터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그는 스웨덴에서 작품 생활을 한다. 모필(毛筆)로 서양화를 그리는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 주목을 받으며 유럽 화단에서도 명성을 얻는다. 이 때문에 그는 국내보다 국제 미술 시장에서 더 호평을 받았다. 1970년 초반부터 1980년 말경까지 거의 매년 스웨덴과 노르웨이,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것도 그런 그의 성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모필을 사용해 불교적 동양 정신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화폭에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한봉덕. 1996년 타계 1년 전, 마지막으로 조선일보 미술관 초대전을 가진다. 그리고 임종 직전 자신의 작품 90여 점을 서울중앙병원에 기증한다.
“스케치 많이 해야지요. 화집을 내고 있는 내 스케치화만 한 1만 장은 될 겁니다.”
그가 남겼다는 말을 옮겨 적는다. 그러면서 인천 시인 한상억(韓相億)의 작품에 그가 커트를 그린 옛 동아일보를 보며 그와 인천과의 인연을 다시 생각해 본다. 불과 1~2년의 짧은 기간이었을 터이지만 그가 걸었을 가을이 내리고 있는 인천의 어느 거리도 머릿속에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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