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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한국 수필 문학의 거봉 조경희 여사

by 형과니 2023. 4. 26.

한국 수필 문학의 거봉 조경희 여사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20 00:12:38

 

한국 수필 문학의 거봉 조경희 여사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인천광역시 강화군이 배출한 인물 조경희(趙敬姬, 19182005) 여사. 길상면 온수리 출생. 길상공립보통학교, 서울 동덕여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신문기자. 여류수필가.

 우리 문단을 통틀어 조경희 여사만큼 문학, 예술 단체에서의 활약이 컸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본직이었던 언론계 쪽의 활동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잠시도 한가한 틈이 없었던 삶이었다고 할까. 여사를 표현함에 있어 흔히 일컫는 여걸이라는 말도 생전 활약에 비춰볼 때에는 크게 미흡한 감이 있다.

 

 

 

먼저 그의 언론계 생활을 대략 살펴보자. 조 여사는 1939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투신한다. 1940년 조선일보 폐간 후 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서울신문, 중앙신문 기자, 그리고 부산일보 문화부장, 잡지 여성계주간, 평화신문 문화부장 등을 두루 거친다. 1960년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그리고 다시 한국일보로 자리를 옮겨 1973년 논설위원직을 끝으로 30여 년의 언론인 생활을 접는다.

 

 그가 처음 문단에 등장한 것은 1938측간단상(厠間斷想), 같은 해 조선일보에 영화론(映畵論)을 발표하면서부터다. 1938년은 조 여사가 이화여전 졸업반 시절인데, 특히 이 영화론(映畵論)이 조선일보사의 눈에 띄어 다음해 기자로 발탁되는 운명작(?)인 셈이다.

 

 언론인, 수필가로서의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조 여사는 1971년과 1972, 한국수필가협회 회장과 한국여기자협회 회장을 잇달아 맡는다. 이어 1973년 수필 전문지 한국수필발행인이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예술 문화 단체의 중요 직책을 두루 역임한다.

 

 1974년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를 필두로 1978년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198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직무대리, 이어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맡았으며, 1986년 문예진흥후원협회 부회장, 그리고 19882월 정무2장관에 취임한다.

 

 그 사이에 조 여사는 국제펜클럽대회 참석, 문화사절단, 미 국무성 초청 등으로 아시아를 비롯한 구미 각국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후에도 그는 칠십 후반의 나이에 이르도록 정력적으로 활동을 펼친다. 1988년 예술의전당 이사장, 교육정책자문위원, 한국여성개발원 이사장, 서울예술단 이사장, 예총 명예회장, 이화여대 동창문인회 회장,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예술원 회원이 된다.

 

 생전에 수상한 상훈 역시도 그의 큰 활약과 보폭(步幅)을 느끼게 한다. 한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청조근정훈장, 프랑스예술문학공로훈장, 춘강상, 은관문화훈장, 3회문예학술저작상, 50회 대한민국예술원상, 한국수필대상 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한국 언론계에, 또 한국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조경희 여사에 대해 실제 인천은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는 점이다. 실제 그를 인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강화 출신으로 한상억(韓相億) 시인이나 최영섭(崔永燮) 작곡가 같은 사람들은 인천을 터전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천인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비해 같은 강화군 출신의 조경희 여사에 대해서는 외지인 같은 약간의 생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은 태반이 그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출신이라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인천시사에도 그에 대해 한마디의 언급조차 없는데 강화가 행정구역 통합으로 인천광역시에 포함되기 전의 인천문화사만을 기록하면서 빚어진 실수가 아닌가 싶다. 비록 조 여사가 생전에 인천과의 연관을 거의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시사의 기자(記者)는 이런 중요 인물에 대한 기록의 탈루(脫漏)를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해방 이후 그의 활동을 대략 살펴본다. 19463월 정인보(鄭寅普), 이선근(李瑄根), 이관구(李寬求), 설의식(薛義植), 손진태(孫晉泰), 안호상(安浩相) 제씨의 발기로 학자, 평론가, 소설가, 시인, 신문·잡지·통신 등에 종사하는 저널리스트를 총망라한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는데 조경희 여사는 440명 추천회원에 포함되어 이 협회에 가입한다.

 

 이어 194812월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민족정신앙양전국문화인총궐기대회에 각계 500명 인사에 한 사람으로 초청된다. 그리고 194912월에는 종래의 전국문필가협회 문학부와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중심으로 일반 무소속 작가 및 전향문학인을 포함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문학단체로서'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도 추천회원으로 참여한다.

 

 누구에게나 그러했겠지만 조 여사도 해방과 6·25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이 인생에 커다란 변환을 가져 오게 했다. 특히 6·25는 그의 운명을 뒤바꿀 뻔 했다. 조경희 여사는 195010월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노천명(盧天命) 시인과 함께 북에 대해 부역했다는 혐의로 심리를 받고 징역 20년을 선고받기도 하는 것이다.

 

 죽을 걸 살았어요.”

 북에 의해서도 투옥되기도 했다. 결국 그는 6·25라는 비극을 통해 남과 북에 의해 동시에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남긴 이 마지막 구술(口述) 한 대목이 그때의 어려웠음을 짐작케 한다.

 

 조경희 여사는 생전에 아름다운 수필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그의 수필은 인생, 사회, 사상(事象)에 대하여 가벼운 터치로 일관한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는다. 1949민성6월호에 발표한 쌀과 학생과 훈련」 「放書譚」 「그리고 1954신천지6월호에 실은 얼굴등의 작품을 비롯해 우화」 「봄날」 「여행」 「목물」 「」 「재떨이」 「나의 하루」 「구두」 「걸인찬」 「음치의 자장가」 「손수건의 미덕」 「가깝고 먼 세계등의 대표작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우화(寓話)』 『음치의 자장가』 『가깝고 먼 세계』 『얼굴』 『낙엽의 침묵』 『면역의 원리』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 『언제나 샛길을 밝고 힘차게등의 작품집이 있다.

 

 “<전략> 이런 것으로 미루어 봐서 유명한 관상가가 관상은 즉 심상(心相)이라는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얼굴의 아름답고 미운 생김새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쓰기에 달려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치이리라! <중략>

 

 자비를 목표로 삼는 종교가의 얼굴에서 무자비한 표정이 엿보였을 때 실망은 크다. 일반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어야 할 지도자나 교육자의 얼굴에서 야망과 욕심이 불타는 인상을 느끼게 된다면 실망하게 된다. 최소한도 자기 이름 석 자 밑에 집 가()자의 글자 한 자씩을 덤으로 붙여 부르는 영예를 자랑하려면 우선 얼굴의 표정부터 고쳐야 된다. 또한 체면이니 철면피니 하는 말에 대한 의의도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정 모나리자의 미소를 아름답게 느끼듯이 아름다운 얼굴, 바로 아름다운 인품을 느낄 수 있으면 이에 더한 바람은 없을 줄 안다. 미남 배우 로버트 테일러의 미보다는 희로애락의 곡절이 배인 조화의미가 어우러진 버나드 쇼 옹의 얼굴에서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은 웬일인가.”

 

 조 여사의 대표 작품인 얼굴의 일부분이다. 요즘처럼 내가 이 나라를 책임지겠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서는 때에 누구나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한 글이다.

 

 조 여사는 천안시 광덕면 선영에 잠들어 있다. 강화에 세운다는 조경희 문학관은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여전히 소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