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임직순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20 00:15:31
인천과 가느다란 인연을 가진 화가 임직순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화가 운창(雲昌) 임직순(任直淳, 1921~1996)은 인천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시작부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미 임직순이 인천 인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분명 그는 인천 사람은 아니다. 직장 때문이었을 테지만, 어찌어찌 인천에 와서 잠시 살다 간 사람이다. 『인천시사』에도 그가 스쳐가듯 인천에 ‘일시 유입’되었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인천화단에서 활동한 화가들로서는 이 지역 출신이거나 적어도 전적으로 생활 기반을 인천에 둔 화가들 외에 외지에서 일시 유입된 인사들도 있었다. 이달주(李達周), 임직순, 정상화(鄭相和), 황용엽(黃用燁), 조용익(趙容翊), 김종휘(金鍾輝) 등이 그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들은 거의가 교직에 종사하면서 직장 관계로 머물다가 떠난 케이스이다. 이처럼 미술인들의 이동이 빈번했던 시기가 1960년대 이후부터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천시사』에 등장하는 임직순에 대한 기록이다. 조금 더 시사를 읽어 보자.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 최초의 순수 미술인 단체로 <인천미술인 동인회>라는 그룹이 탄생되었다. 세루팡이라는 다방에서 모임을 가진 창립 동인은 이건영(李建英), 최석재(崔錫在), 김순배(金舜培), 김찬희(金燦熙) 등이며 임직순, 김기택(金基澤) 등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는 별도로 <인천미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 회원은 서양화에 박응창(朴應昌)·김학수(金學洙)·우문국(禹文國)·김찬희·이명구(李明久)·윤기영(尹岐泳)·한봉덕(韓奉德), 서예에 류희강(柳熙綱)·박세림(朴世霖)·장인식(張仁植), 미술평론에 이경성(李慶成) 등이다. 해방 후 인천 화단을 형성하는 모체로서 이들 단체가 출범하기는 했으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와해되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딱 두 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 내용을 보면 외지에서 직장 관계로 인천으로 온 임직순이 주도적이지는 않았어도 해방 후 인천 최초의 미술단체인 <인천미술인 동인회>에 몸을 담음으로써 초창기 인천 화단 결성에 한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밖에 그와 인천과의 관계를 소상히 밝힌 기록은 현재 거의 없는 실정이다.
“운창 임직순은 1921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도일(渡日), 1940년 일본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임무(林武, 전 일본대학교 교수) 고야진실(高野眞實)에게 지도받았다.
1940년에는 일본미술학교 재학중에 제 19회 선전(鮮展)에 <靜物>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선전은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창설된 미전이었지만, 당시 젊은 화가들이 실력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장(場)이었다. 1941년에는 제 20회 선전에 다시 입선되어 한국인 유학생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43년 한국으로 돌아왔고, 1945년 8·15해방 후에는 서울여상, 인천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6년에는 숙명여중고에서 교편을 잡아 미술교육자로서 또 화가로서 행보를 계속했다.
1957년 제 6회 국전 때는 꾸준하게 노력과 부지런함으로 닦아온 그간의 역량을 인정받아 문교부장관상을 거쳐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1년에는 모든 예술가들이 서울로 오는 추세에 반하여 광주에 조선대학교 교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임직순은 광주의 무등산 풍경, 시골 풍경을 주제로 한 주옥같은 작품들을 제작했고 후학을 양성했다.
1967년에 임직순은 한국문예상 미술본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것이 인터넷 ‘임직순 사이트’에 올라 있는 그의 경력의 일부인데, 운창은 충북 사람으로, 1945년 해방 후 서울여상고와 인천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이 막연하게 적혀 있기는 하더라도 바로 『인천시사』의 불투명한 내용을 다소나마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이 언급뿐으로, 인천행에 따른 어떤 연유나 사연, 인천에 머무른 기간, 행적 따위는 더 밝힐 수가 없다. 혹 인천여고나 교육청에 보관되어 있을 그의 교사 근무 기록을 찾는다면 최소한 그가 인천에 머물렀던 시기와 기간은 추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해방 이래 우리 미술계에 대성관(大盛觀)을 보게 된 것은 개인전의 범람이다. 이 개인전이 금년에 들어서서는 더욱 번성하여 유명·무명·기성·신인의 작가군이 동화(東和)·대원(大元)·미문(美文)·화신(和信)의 네 화랑을 무대로 용출(湧出)하였다. 생각나는 대로 그 이름을 적으면 아래와 같다.
전반기에 있어서 배운성(裵雲成), 이건영(李建英), 이응노(李應魯)·이석호(李碩鎬) 2인전, 이용우(李用雨), 고 김재선(金在善)·송모(宋某) 부부유작전, 임자연(林子然)·천경자(千鏡子), 박원수(朴元壽), 이기정(李己正), 이경배(李慶培), 김흥수(金興洙), 백영수(白榮洙)의 제씨와 후반기에 들어가 임직순, 박영선(朴泳善), 이세득(李世得), 이준례(李俊禮), 김세용(金世湧), 조진관(趙寬衡), 이응노(李應魯)의 제씨가 동서양화를 또는 인형으로 기축의 화원(畵苑)을 은성하게 하였다.”
1949년 12월, 당시 발간되던 《주간서울》에 실린 「미술계 1년」의 내용으로 인천 작가로서 전반기의 이건영과 함께 후반기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거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이 인천 체재 당시인지 불분명하지만 이 무렵 운창은 이미 매우 주목받는 화가의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5년에 운창은 “적확(的確)하고 경쾌하고 타치”라는 평과 함께 작품 「불상(佛像)」으로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받고, 1957년 10월 제6회 국전에서 서양화 「좌상(坐像)」으로 드디어 대망의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아마도 1955년의 문교부장관상 수상은 인천여고 시절이 아닌가 싶으며 이에 더욱 고무된 그가 서울 숙명여고로 옮긴 후 마침내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76년에는 급성간염으로 4주간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병실에서도 의욕적으로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작품은 시각적(視覺的)인 진실에서 심각적(心覺的)인 진실로 탈바꿈하게 된다.
1986년에는 대한민국 문예상 본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93년에는 서울시 문화상 미술부문 본상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보관문화훈장 및 문예상 본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평생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화업(畵業)에 정진함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구었던 임직순은 1996년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앞에서 인용했던 운창의 연보 뒷부분이다. 그가 어느 작품전,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밝힌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후반기 작품의 ‘심각적(心覺的) 진실’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빛과의 만남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색깔을 추구하는 것이 오랜 나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제 난 색채 자체에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이 보여 주는 어느 순간의 색이 아니라 본질적인 색깔을 갖고 싶다. 이것은 현장으로부터 떠난 그림을 그리려는 변화에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태양 아래서의 색이 아니라 내면의 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눈으로 보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그려야겠다는 강한 충동으로 캔버스 앞에 앉곤 한다.”
운창 임직순 화백. 그는 경기도 용인 가톨릭 묘지에 잠들어 있지만, 생전의 한때는 인천에서 살면서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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