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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사진작가 이종화 선생

by 형과니 2023. 4. 26.

사진작가 이종화 선생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19 09:09:07

 

배꼽산을 기록한 사진작가 이종화 선생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이종화 얼굴

 

 문학산성은 일제시대 약간의 조사 자료를 남긴 외에 별다른 보호 조치가 없었으며,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땔감으로 산림이 황폐화되는 등 더욱 퇴락하였다. 다행히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 이후 향토사 연구자의 관심에 힘입어 1958년에는 인방석이 주저앉고 성벽도 허물어진 동문지를 복원하고, 인방석에 문학산성동문임을 각자(刻字)하는 한편 도천현에서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십제고도문학산성(十濟古都文鶴山城)’이라 새긴 표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미군기지 건설이 발의되고 1960년 이를 위한 공사가 진행되면서 문학산 정상부를 삭토하고 산성의 서문지를 비롯한 성벽을 헐어내 버렸다.

 

인천시에서도 이의 보존을 위한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1962년에 부대가 들어서자 어찌하지 못하였다. 이때 봉수대와 건물지 그리고 동·서문 자리 등이 소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1965년 간행된 이종화(李宗和)의 도록 문학산만이 부대가 들어서기 전 산성과 주변 지형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우리 인천에 남아 있던 백제의 유적 문학산성이 1960년대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훼손된 사실을 이야기하는 인천시사의 내용인데, 이 인용문의 말미에 나오는 사진작가 이종화 선생이 아니었다면 인천의 주산인 문학산의 진면목을 후대 사람들은 영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특히 그는 이설(異說)이 있는 비류왕릉의 위치에 대해 미추왕릉이 문학산에 있다는 전승은 1965년 이종화의 문학산에서 구체적으로 그 위치가 제시된다. 곧 문학산 북록 돌출부에 있는 고총(古塚)을 마을 주민들이 비류왕릉이라 한다며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였다인천시사의 기록처럼 문학산 비류왕릉설을 사진으로써 세상에 알린 것이다.

 

 문학산은 이미 서기 이전(B.C. 18), 향토 인천의 지명을 우리 역사에 기록케 하였다. 이처럼 유서 깊은 고적을, 비록 국방상 불가피하였다고는 하지만 2000년의 이끼가 낀 갖가지 유물과 산성 그리고 봉화대까지를 삽시에 잃었다는 것은 참으로 서운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이러한 사실(史實)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 고서에 약간 비쳐져 있었을 뿐, 이에 대한 상세한 연구나 조사에 소홀하였다는 것은 더욱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다행히 이종화 선생은 본업이 의사이면서도, 예술 사진가로서 고적의 존귀함을 일찍부터 깨닫고 바쁜 틈을 타서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문학산의 원형(原形)을 비롯한 그 변천상과 이에 따르는 사적 및 전설에 이르기까지의 조사와 세밀한 기록을, 특히 자비(自費)로써 이루었다는 데 경탄을 금할 길이 없으며, 또한 그처럼 꾸준한 노고에 대하여 한껏 치하를 드리는 바이다.

 

 이번 우선 소책자로나마 문학산을 상재하는 연유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값진 기록 사진의 산실(散失)과 변질을 막는 데 있다는 것을 밝혀 두고자 한다. 이종화 선생의 역저는 방금 편찬중에 있는 인천시사의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문학산에 실린 윤갑로(尹甲老) 당시 인천시장의 서문인데 이종화 선생의 사진첩 문학산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 짐작케 한다.

 

 

 훗날 인천 향토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것저것 인천 관련 자료와 서적들을 들춰보면서도, 선생이 문학산, 이 책 한 권에 남긴 열정과 노고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 역사는 글로서의 사실 기록이 절대 중요한 만큼, 고스란히 당시 실물 그대로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처럼 귀중한 자료가 또한 다시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더구나 선생은 단순한 문학산 사진 기록을 넘어 그 위에 소박한 대로 주변의 전설, 야사(野史)까지 수집, 채록한 것이다.

 

 무슨 연유로 문학산을 사진기에 담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시절의 조건을 무릅쓰고 굳이 문학산을 찾았는지. 비록 그이가 의사로서 얼마간 생활의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1950년대 말이라면 아직도 의식주 문제 외에는 당시 인천시민 누구도 관심 안에 두지 않던 문학산을 왜 그토록 연연했는지.

 다행히도 1938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이종화 선생이 해방 후 인천에서 개업을 하게 되었다. 의사이면서 유능한 사진작가였던 그는 갑작스러운 변모로 모든 사적을 잃어가고 있는 문학산을 애석하게 생각한 나머지 사진 작품 문학산이란 명저를 남겼다. 문학산이 군사보안지구가 되어 일반의 왕래가 곤란했는데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기록 사진을 수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선생의 대단한 노력과 집념의 소산이라고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인천 태생도 아닌 그가 인천의 주산인 문학산에 쏟은 애정은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류왕릉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인천 한 세기에 이종화 선생을 기려 쓴 배꼽산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이종화 선생이 왜 인천 사람도 아니면서문학산을 그토록 애중(愛重)하고 또 애착했는지 이 몇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천에 대한 남다른 사랑, 문학산에 대한 유별난 애심(愛心)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컬러 사진집 발간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이다.

 

 그해 34일 인천공보관에서 있은 출판기념회에서 윤갑로 시장은 축사를 통해 일제 시기나 해방 후나 인천 역사의 발상지에 대한 사진이 없었던 데다 미군 기지를 축조하느라 파괴된 마당이어서 더욱 소중하다고 말했다는 시사(市史)의 기록 역시도 그이의 높은 공로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오늘 우리 인천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소중한 사실--문학산이 그 정상에 배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인 이 문학산의 재발간을 진정 뜻깊게 생각하며, 이런 인천 서적 발간 운동을 통해 인천 연구, 인천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이종화 선생의 그 문학산을 지난 20061, 실로 40년 만에 인천 다인아트 출판사에서 재발간할 때 외람되게 내가 쓴 졸문(拙文)이다. 이종화 선생이 남긴 사진 예술가로서의 업적도 업적이려니와 인천 역사 기록자로서의 위치가 이처럼 크고 높았다는 것을 윤갑로 시장이나 신태범 박사처럼 밝혀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 이종화 선생은 인천 문화 발전을 위해서도 큰 공로를 세웠다. 5·16 군사정변 뒤, 기존의 예술 문화 단체가 모두 해체되고 새로운 문화 단체의 재구성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인천 최초로 조직된 문인협회를 위시해 미술, 음악, 국악, 사진 단체 대표가 1962227일 인천문화회관에 모여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약칭 예총) 인천지부를 결성하는데 이때 선생이 초대 지부장을 맡는다.

 

 이뿐만 아니라 이종화 선생은 1962년 인천사진협회를 태동시키면서 초대 회장을 맡는다. 이후 1969년과 1973년 등 도합 세 차례나 회장직을 수행한다. 10여 년 기간 동안 선생이 인천 사단에 남긴 발자취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1958년 개최한 컬러 슬라이드전시회는 인천 사진 역사상 최초의 컬러사진 전시회로 기록된다. 1959년에는 한국기상학회 주최 전국구름사진공모전에서 당당히 교통부장관상을 수상하고, 1962년 인천사진협회 지부장을 맡으며, 1966년 제13월 공모전에서 10걸상을 수상한다. 이종화 선생은 1968년 중앙사단 심사위원이 되는데 이 또한 인천협회 회원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이렇게 선생은 사진작가로서 크게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도 이곳에서는 그다지 크게 조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천시사인물편에 있음직한 선생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어디 출신인지, 어떻게 인천에 왔는지, 생년의 기록은 없이 1974년 몰년만 사진협회 연혁에 드러날 뿐이다.

 

 애초의 목적은 역사를 기록하려는 그처럼 거창한 데 두었던 것이 아니라 문학산과 그 주변 산야와 바위나 무명초에까지 스며든 우리 선민(先民)들의 체취를 더듬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수많은 천연색 슬라이드 중에서 사적(史的) 가치가 있음직한 40여 점을 골라서 엮느라 하였는데, 이것이 향토사 자료가 될 수 있다면 천행일 따름이다.”

 이종화 선생의 문학산후기(後記)는 이처럼 소박하고 겸손하다. 명리(名利)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산야와 바위나 무명초에까지 스며든 우리 선민들의 체취를 더듬는 데 주안점을둔 순수한 한 예술가의 주제의식, 미의식만 곧게 나타나 있다.

 

 그렇기로서니 선생을 그런 공소(空疎) 속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인천의 대표적인 사진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소상히 기록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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