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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화가이면서 인천시장이었던 윤갑로 씨

by 형과니 2023. 4. 26.

화가이면서 인천시장이었던 윤갑로 씨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20 00:18:20

 

 

화가이면서 인천시장이었던 윤갑로 씨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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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갑로(尹甲老)씨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단순히 과거 인천시장을 역임했던 인물 중의 한 명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실제 그는 인천이 직할시나 광역시가 되기 훨씬 전인 196521일부터 1966711일까지 15개월 남짓 제12대 인천시장으로 재임했었으니까 잘못 된 것은 아니다. 또 인천시청 대회의실에도 역대 시장들 사진과 함께 윤 시장의 모습도 나란히 걸려 있으니 말이다.

 

 

녹청자 도요지

 

 그러나 우리는 그를 단순한 인천시의 행정 책임자뿐으로서만이 아니라 역대 28명 시장 가운데 단 한 명 예술인 시장으로 기억한다. 비록 그가 미술가로서의 작품 활동이나 혹은 작품으로 일세를 풍미할 그런 명성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인천 화단에 남긴 공적과 인천시에 재임하면서 펼친 예술 행정은 우리가 두고 기억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소회(五素會)>의 출발은 이색적이고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50대 중반 연령의 동호인 모임이라는 점, 현역 전업 작가는 물론 대학 교수와 현직 인천시장이 참여했다는 점, 회화(동양화·서양화)와 서예, 그리고 평론가의 그림까지 곁들인 오소회는 문화계 인사들의 집합 장소이기도 했던 은성다방에서 모임이 추진되었다. 전시장도 같은 장소를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1969년 제1회전에서 1978년의 8회전까지 비교적 오랜 수명을 누린 그룹이 되었다. 도중에 회원 교체도 있었는데 창립 회원은 서양화의 박응창(朴應昌), 김영건(金永健) ,우문국(禹文國) 등이며, 여기에 아마추어 화가로서 윤갑로(尹甲老, 인천시장), 이경성(李慶成, 홍익대 교수, 평론) 등도 가세하고 있다. 2회전 이후 류희강(柳熙綱), 장인식(張仁植), 정재흥(鄭載興, 서예), 오석환(吳錫煥, 동양화), 황병식(黃秉植, 서양화) 등이 신입 회원으로 출품하였다.”

 이 중 <오소회>멤버는 미술인들이 대거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겨 갔던 60년대에 인천에서 미술 발전이라는 일종의 소명 의식을 가졌던 이들이 만든 미술 동인이다. 박응창, 김영건, 이경성, 윤갑로, 우문국 등은 당시만 해도 변변한 전시장이나 화랑이 전혀 없었기에 신포동, 은성다방을 본거지로 삼고 이곳에 모이고 이곳에서 미술전을 개최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분히 아마추어리즘을 바닥에 깔고 있었다. 이경성은 이미 미술평가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오소회전에는 추상적 경향의 크레파스화를 출품하였고 당시 인천시장이던 윤갑로 씨도 작품에 열중했다.”

 앞의 기록은 인천시사의 것이고, 뒤의 인용문은 인천 출신 미술평론가 김인환(金仁煥)고여, 인천 화단의 산증인이라는 논평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두 글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글들을 통해 아마추어 미술인이지만 윤갑로 시장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교향악단

 

 윤갑로 시장은 1913년 경기도 장단면 장도군에서 출생했고, 학력은 경성농업학교(京城農業學校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전, 경기도 장단군농회(長湍郡農會) 기수(技手)를 시작으로 경기도 사회과 주사, 경기도 강화군속(江華郡屬), 그리고 해방 후에는 경기도 강화군 총무과장, 강화군 내무과장, 경기도 장단군, 평택군 내무과장을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1952년 강화군수 승진에 이어 1954년 경기도 이천군수와 경기도 문교사회국 사회과장을 역임하고 1956년 보건사회부 서기관, 1957년 주택과장 등 탄탄한 공무원 경력을 쌓는다. 1965년 인천시장으로 발령이 된 것은 그런 경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가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맞을 뻔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19334월 경성농업학교 4학년 때, 철기단(鐵騎團) 독서회사건(讀書會事件)이다. 동대문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사안이 경미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이 조직은 농민 교육과 계몽 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주입해 조선 독립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당당한 결사(結社)였다.

 

 윤갑로 시장이 인천시장으로 부임하여 인천 문화계에 끼친 공적은 매우 큰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나라 전체가 아직 빈한한 지경이어서 문화 인프라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할 때였지만, 윤 시장은 이때부터 인천의 문화계에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다. 경성농업 시절 독서회를 조직했던 것으로 미루어 윤 시장은 이미 이런 방면에 자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6512월에서 1966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된 국가지정 사적 211호인 서구 경서동 녹청자 도요지에 대해 특별예산을 들여 유구(遺構) 위에 겉집을 세워 보존토록 한 사람이 바로 윤갑로 시장으로 그는 이미 문화 예술에 대한 그처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부임하자마자 손을 댄 것들이 모두 오늘날 우리 인천의 문화, 역사의 체계를 잡는 데 기초가 되고 있다.

 

 

 

시민의 날

 

1965애향심을 고취하고 온 시민이 다 같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날을 정하자.”고 제안해 최초의 시민의 날을 탄생시킨 것이나, 19665월 정식으로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창설한 것, 그리고 1965인천시사편찬을 위해 고일(高逸), 최정삼(崔定三), 한상억(韓相億) 등 세 사람을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에 위촉, 비록 시일은 미루어졌으나 1969년 우리 손으로 집필한 최초의 인천시사·하권을 발간하게 한 일 등은 모두 윤 시장이 거둔 문화적 성과였다.

 

 이밖에도 윤 시장은 재임 동안 문화 사업에 손을 많이 댔는데 그 한 가지가 지난번에 소개했던 이종화(李宗和) 선생의 사진집 문학산이었다. 이 책은 전적으로 윤갑로 인천시장의 힘으로 상재가 가능했다. 윤 시장이 특히 문화 행정, 문화 인프라 구축에 열심이었던 사례는 1946년 무렵 벌써 강화문화원의 터를 닦았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인천시사의 기록을 보자.

 “1946년 당시 강화군수였던 윤갑로를 개관 관장으로 하여 강화문화관이 개관되었으며, 2대 관장은 유지영(劉智榮)이 맡았다. 1962년 배청홍(裵淸弘)이 강화문화원 창립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으며, 1965년 사단법인 강화문화원의 인가를 받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윤 시장은 전문 화가가 아닌 아마추어였지만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만큼은 누구와 비할 바 없는 넓은 것이었다. 특히 그는 인천의 문화 예술인들과도 늘 심정적 교류를 갖고 의사를 소통하던, 그리고 많은 성원을 베풀던 소탈한 인물이다. 그의 그런 면목은 당시 신포동 시장 안의 <백항아리집>이라는 허름한 대폿집에 여러 예술인들과 드나든 사실로써도 분명해진다.

 

 “6·25 사변 이후 90년대에 이르도록 가난했지만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던 신포동. 그냥 도로 포장이나 붉고 푸르게 해 놓고, 가로등이나 멋 내서 세우면 문화의 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득 문화라는 말에 걸맞은 내용물, 요새 즐겨 쓰는 말로 콘텐츠 개발을 하자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시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실한 문화 알맹이의 개발!

 한 번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동상은 값이 비싸니까 이 신포동에서 몸으로 예술을 살다 간 한상억, 김길봉, 최병구, 손설향, 심창화, 김창황 같은 시인, 작가들, 유희강, 박세림, 우문국, 김영일 같은 서예가들, 화가들, 그리고 여러 사진작가, 음악가들의 사진을 적당한 크기로 동판에 부조(浮彫)해서 신포동 길가에 설치하면 어떨까. 거기 동판 사진 밑에 간단한 약력과 대표 시 또는 대표작 한 구절과 일화를 새기는 것은 물론이다. 헐리우드 배우들의 손자국이나 발자국이 흥미로운 관광 자원이 되듯이 작고한 인천의, 신포동의 예술인들 모습을 그렇게 거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지역 홍보로도 그만일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혼자 신포동 약주에 취했는지 모르겠다. 옛날 윤갑로(尹甲老) 인천시장이 미술인들과 더불어 <백항아리집>에 들르던 그 시절쯤 이런 생각이 났으면 그게 가능했을까. 신포동이 너무 쓸쓸하고 추워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들었나 보다. 최병구, 손설향 이 양반들이 저 세상에서 이런 얘기를 듣고 반길까 어쩔까.”

 어느 기관 잡지에 아무렇게나 썼던 졸고의 일부분이다. 윤 시장 같은 분을 다시 신포동 저자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가 재임하면서 인천 문화 발전에 애쓴 공적은 오늘날까지 역대 어느 시장보다도 크고 빛난다. 더구나 그가 시장으로 있던 시절은 우리나라가 아직 빈곤을 떨치지 못한 어려운 때가 아니었던가. 그는 우리가 자랑할 인천의 문화 예술인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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