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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이길용

by 형과니 2023. 4. 27.

이길용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8-05-23 13:03:01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 사건 주인공 이길용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동아리보사 직원 교질 건

 

이길용(李吉用, 1899~?)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선 사진을 동아일보에 전재하는 과정에서 유니폼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 민족의식을 고취한 장본인으로, 그래서 급기야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정간(停刊)되기에 이르렀던 소위 일장기 말살 사건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길용은 이 사건뿐만 아니라 사회 계몽 운동과 항일 운동을 펼친 독지가였으며, 문학인, 언론인, 체육인으로서 여러 방면에 능력을 발휘했던 다채로운 활동 경력의 소유자다. 이길용이 사회 운동을 펼친 것은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교 재학생, 졸업생이 모여 1920년 전후 시기에 창립한 인배회(仁培會)의 활동을 통해서다. 그는 이 모임의 멤버로 후에 회장을 맡기도 했는데, 이 인배회가 주로 사회 운동을 목적으로 했던 단체였다.

 

이 같은 사실은 제물포청년회가 1924917일부터 5일간 지방청년강습회를 개최했다는 시대일보의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또 그보다 몇 달 앞선 1924423, 대중 운동 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취임한 것도 그의 사회 운동 경력을 말해 준다.

 

동아일보 발간 정지 조치 문서

 

그는 일장기 사건 훨씬 전인 19204‘3·1운동 1주년 선언문 배포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돼 12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사건은 그가 대전역 개찰원으로 있을 때, 우리 항일 조직이 작성한 ‘3·1운동 1주년 축하 경고문’ “20장을 동지인 대전 춘일정(春日町) 최성운(崔聖云)에게 주고, 또 대전 시장의 한부(韓富)란 사람에게 약 100장을 수교하고, 시내에 살포시켰다는 것이 그 전모다. 실제 이길용은 배재학당을 나온 뒤, 용산철도강습소에서 6개월 코스의 교육을 마친 뒤 대전역 역원으로 배치돼었었다.

 

 

또 그가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인천에서 문학 활동을 펼쳤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눈에 띈다. 인천시사제물포청년회에서 만든 기관지 제물포에는 이길용, 송건우(宋健雨), 장건식(張健植), 고일(高逸) 등이 정력적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활동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인천이 한 지역의 큰 도시로 형성되면서 처음으로 문화적 활동의 싹을 보여주었다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 인천시사에는 이길용에 대해 대체로 동아일보의 초대 지국장은 하상훈(河相勳)이었으며 2대 지국장은 서병훈(徐丙薰), 그 다음이 이범진(李汎鎭김헌식(金憲植)이었다. 당시 기자는 이길용·이범진·김헌식·곽상훈(郭尙勳) 등이었다. (중략) 특히 이길용은 서울 본사로 진출하여 운동부장이 되었는데 1936825일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마라톤 제패 때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유명하다. 후손은 얼마 전까지 부평에서 거주했다는 기록 정도가 실려 있을 뿐이다.

 

이길용이 인천사람임은 본인 진술에 의해 밝혀진다. 앞서의 ‘3·1운동 1주년 선언문 배포 사건으로 취조를 받을 때, 그는 자신이 인천 우각리에서 출생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에는 그의 출신지가 경기도 부천군 부천면 마분리 신촌으로 본인의 진술과는 다르게 기록돼 있다. 학교는 인천영화학교를 거쳐 배재학당 2년을 마치고, 일본 경도(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예과 1년을 수료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니까 용산철도강습소(龍山鐵道講習所) 6개월 과정은 그 뒤의 일로 보인다.

 

그의 주요 경력은 왜정인물1권에 실려 있는데 철도강습소를 나온 후 대전역 역부(驛夫)로 종사함. 19204월 불온문서를 배부하여 처벌받음(制令 위반으로 징역 12). 19216월 출옥 후 동아일보 통신원이 됨. 1922년 대전철우회(大田鐵友會) 설립과 함께 동회 총무가 됨. 19236월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가 됨. 인천제물포청년회(仁川濟物浦靑年會) 회장,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 평의원(評議員), 인천영화학우회(仁川永化學友會) 간사를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밑에 일본 경찰이 쓴 주()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그 사이 항상 배일적(排日的) 언동을 자행했던 자인데, 그 후 경성으로 이거(移居)이라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의 외모와 인상에 관한 기술로 51. 둥근 얼굴형에 까만 피부. 앞쪽 윗니에 금니가 있음.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고취 선전할 우려가 있음하면서 거듭해서 요시찰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동아일보 손기정 사진 말소의 건

 

여기서 잠깐 이길용이 인천에서 기자생활을 했던 시기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1921921일자 동아일보 사고(社告)는 이길용을 대전지국 기자로 채용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것이 선언문 배포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기자의 길로 들어선 첫 발인 듯하다. 이어 이듬해인 1922730일에는 다시 대전지국 총무 겸 기자로 발령된 내용이 보이고, 다시 1923년 이길용이 인천 앞바다 굴업도의 폭풍을 취재한 기사가 보이는데 이 해 623일 대전지국을 사임하고 인천지국 기자로 옮겼던 것이다.

 

이후 이길용은 기자로서의 생활에만 전념하는 듯하다.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김해 농민 소요 사건 같은 전국의 중요 사건 현장을 따라다니며 취재하거나 체육 기자로서의 활동만이 눈에 띈다. 그러나 애초 그가 어떻게 체육전문 기자가 되었는지는 미상하다. 또 인천을 떠난 시기도 불명하다. 아무튼 그러다가 19368월 일장기 말소 사건을 일으키는데, 192020세에 일으킨 ‘3·1운동 1주년 축하 경고문배포 사건 이후 그의 배일, 항일 정신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이 일장기 사건으로 동아일보를 퇴사했던 이길용은 8·15 해방 후 동아일보에 복직해 사업부장을 지내고, 서울특별시 고문, 한국민주당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한다. 그 무렵 대한체육사집필에 전념하던 중 6·25가 발발하고 그때 납북돼 생사불명이 된다.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초기 한국 스포츠 발전에 공헌한 그의 업적을 기려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한다.

 

이길용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

 

 

이길용은 인천출신의 항일운동가요, 대 신문기자요, 영원한 대한민국의 체육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3·1만세 1주년 선언문 배포의 주역, 민족의 울분과 자존심의 표출과 함께 반일 의식을 만방에 고취했던 일장기 말살 사건의 주인공, 그리고 역기연맹(力技聯盟, 역도연맹), 씨름협회 등의 체육 단체를 결성해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체육 선각자.

 

그를 일러 인천의 문화예술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천 초기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미했지만 그렇게 그가 흐르게 한 물줄기가 오늘에 이어져 인천 문단의 근원이 됐음도 분명하다. 1935년에 발표한 이길용의 수필 소내기의 일절로써나마 그를 간절히 추모한다.

…… 소내기! 겨울 구름은 눈을 가저 오고 여름 구름은 소내기를 내린다. 여름 구름에서 눈을 바랄 수 없드시 땀 흘리며 일하고 더위를 이기려고 운동하는 이를 떠나서 소내기의 쾌감을 만끽할 수 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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