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아지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5-23 13:01:57
인천문예지 『습작시대』와 시인 박아지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박아지(朴芽枝)라는 이름이 적이 생소할 것이다. 그의 행적이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북쪽 시인이었던 까닭에 일반인들에게는 더욱 낯선 이름일 것이다. 필명(筆名)이라고는 해도 발음이 속된 느낌이 없지 않다. 한자의 훈(訓)에 따라 ‘후박나무의 싹과 가지’로 새겨야 할까. 아무튼 그는 인천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겨우 남아 있는 자료로써 우선 박아지의 신상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본명은 박일(朴一)이며 1905년 함경북도 명천 출생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東洋大學)을 고학으로 다녔으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1926년에 중퇴하고 이듬해에 귀국하고 만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성장기 기록이나 집안 내력도 알 수 없고, 일본에서는 그가 무슨 공부를 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박아지는 귀국과 동시에 카프(KAPF), 즉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담했고, 인천에서 탄생한 문예지 『습작시대』에 시 「흰 나라」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희환 인하대 연구교수의 논문에는 제3호에 평론 「농민시가소론」을 발표했다는 기록이 정확하다. 분명한 것은 박아지가 『습작시대』 발간에 참가했고, “인천을 중심으로 하되 각 지역의 문학청년들이 연대하여 잡지를 만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박아지가 인천과 맺은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습작시대』는 1927년 인천의 희곡작가 진우촌(秦雨村)이 편집과 발행 책임을 맡아 창간한 인천 최초의 문예지인데, 창간호에는 주요한, 김동환, 박팔양, 엄흥섭 등 당대의 주요 문인들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진우촌은 문예지 『습작시대』를 인천에서 발행했는데 박아지, 엄흥섭 등이 호응하였고, 김도인이 그 후에 종합 문예지 『월미』를 펴냈다.”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의 기록에도 이처럼 박아지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겨우 한 줄 짧은 문장에 지나지 않아 실상 그와 인천과의 관련, 혹은 진우촌과의 관계를 유추할 만한 자료는 되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나 1927년 8월 5일자 잡지 『동광』 제16호는 진우촌과 박아지, 이 두 사람의 사이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거기에는 진우촌이 박아지에 헌정한 시 「님께 받은 마음」이 실려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두 사람 사이가 매우 친밀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시의 끝에 “이 노래를 가장 친애하는 벗 박아지께 올린다”는 헌사가 붙어 있는 것이다.
▲ 박아지 사진
端午날에
님께서 주신 그때의 마음을
나는 지나간 많은 날에
이 따의 유혹에 더럽힌 부끄러움을
다시금 님께 받혀 씻으려 한다.
님을 배반한 인간에게
님께 받은 그 맘을 자랑한 어리석음은
실망과 자폭의 술ㅅ잔을 들어
남모를 원한을 위로하였다.
아아 그러나 님을 시긔하는
이 땅의 노래와 웃음의 유혹이
한 많은 나의 술ㅅ잔을 취ㅎ게 하였나니
님께 받은 그 맘은 더 한겹 더러웠도다.
아아 이 날에 맑은 강물에
그 맘을 씻은 옛 사람을 본받아
이제 나도 나의 더럽힌 마음을
님께 받혀 다시금 씻으려 한다.
이 노래를 가장 친애하는 벗 朴芽枝께 올린다.
-「님께 받은 마음」전문
물론 이 시를 통해서는 단순히 두 사람간의 교분의 돈독함 외에 다른 사정이나 정보는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박아지가 자연스럽게 인천 땅을 왕래했을 것이라는 상정(想定)은 가능하다. 꼭 집어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그가 인천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을 했다면 더욱 그런 추측이 맞아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앞서 언급했던 고일 선생이 생존해 계시다면 동년배나 다름없는 연령--고일 선생이 1903년, 박아지가 1905년생이었기 때문에 실제 인천에서의 활동 등, 그에 관련해 목격한 바나 전문(傳聞) 등 자세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 PM 10-59-55
그렇다 하더라도 박아지는 몇 작품만 달랑 『습작시대』에 발표하고는 전혀 인천과는 상관없이 지냈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진우촌 역시 몇 호 『습작시대』 발간 이후 10년 가까이 이름의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진우촌으로 해서 연결되었던 박아지라면 더더욱 인천과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진우촌의 불명(不明)한 10년이라든가 박아지의 인천 활동 내지는 관련 행적 등 많은 미진한 부분들은 특히 인천의 대학에서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맡아 밝혀야 할 숙제가 된다.
이후 행적을 살펴보면 박아지는 1945년 12월 13일 결성된 조선문학동맹에 참여, 시인 정지용(鄭芝溶)이 위원장으로 있던 아동문학분과에 현덕(玄德) 등과 함께 위원이 된다.
박아지가 아동문학분과에 속한 것은 소년잡지 『별나라』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시와 아동문학 작품도 발표했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그의 작품은 진실하고 소박하며 향토적 정서가 짙은 것이 특징인데, 「두부 파는 소녀」 「엄마를 기다리는 밤」 등의 동요와 시집 『종다리』 등이 있다.
박아지의 월북은 1946년이라는 설과 6·25사변 중이라는 설이 있다. 월북해서는 조선작가동맹출판사의 『조선문학』 편집부에서 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월북한 것은 6·25 이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인천이나 서울에서 문학 활동을 하다가 북으로 올라간 이른바 월북 작가여서 그의 작품이 실려 있던 교과서가 문교 당국에 의해 삭제 조치되기도 한다.
▲ 박아지의 평론
1946년 10월 1일자 조선일보는 “문교부에서는 건전한 국가이념과 철저한 민족정신의 투철을 기하고 특히 학도들에 대한 정신 교육에 유감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관계 기관과의 협의 하에서 국가 이념과 민족정신에 위반되는 저작자의 저작물, 괴흥행물의 간행, 발매, 연출, 수출입 등을 일절 금지하기로 방침을 결정하고 우선 지난 15일 각 중등학교에 장관 명의로 공문을 발하여 중등 교과서 중에서 삭제할 저작자와 저작물의 내용을 지시하여 실시하게 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중등국어(1)에 수록된 “가을밤(朴芽枝), 고양이(朴魯甲), 연(金東錫), 봄(朴八陽), 채송화(曺雲), 고향(鄭芝溶), 부덕이(金南天)” 등의 삭제 대상 작품을 발표했다.
이런 조치는 6·25사변 중인 1951년 10월 5일 공보당국에 의해 “월북 작가 작품 판매 및 문필 활동 금지 방침”으로 다시 한 번 하달되는데 ‘6·25사변 전 월북 작가 38명과 6·25사변 후 월북 작가 24명의 이미 간행된 작품은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리는 동시에 차후에도 문필 활동을 금지시키기로 하고, 사변중 납치, 행방불명된 12명의 작품에 대해서는 내용을 검토하여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박아지가 포함된 그 명단 전부를 여기에 옮겨 본다.
▷A급(6·25 전 월북자)-발매금지, 문필금지
林和, 金南天, 安懷南, 朴贊模, 玄德, 李源朝, 李泰俊, 朴世永, 李秉珪, 金史良, 李北鳴, 許俊, 韓雪野, 李箕永, 李燦, 安含光, 韓曉, 洪命熹, 洪起文, 趙碧岩, 吳章煥, 池河連, 吳基永, 朴八陽, 徐光齊, 朴芽枝, 宋影, 林仙圭, 咸世德, 申鼓頌, 金兌鎭, 金順南, 李冕相, 朴英鎬, 李善熙, 崔明翊, 閔丙均, 金朝奎 계 38명 ▷B급(6·25 후 월북자)-기간발금, 문필금지
洪九, 李庸岳, 李秉哲, 薛貞植, 朴泰遠, 文哲民, 裵皓, 任西河, 金東錫, 金二植, 朴啓明, 朴尙進, 安基永, 鄭玄雄, 金晩烱, 朴文遠, 李範俊, 李建雨, 鄭鍾吉, 金永錫, 姜亨求, 朴魯甲, 金沼葉, 鄭鍾汝 계 24명
▷C급-내용 검토
鄭芝鎔, 蔡廷根, 朴露兒, 金燦承, 鄭人澤, 金哲洙, 崔永秀, 金起林, 金弘俊, 金基昶, 朴來賢, 鄭廣鉉 계 12명
이념 분단의 비극에 휘몰렸던 박아지. 그와 인천과의 연관을 풀어내는 동시에 그의 문학적 위치 확인은 역시 우리 인천의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몰년(沒年)은 1959년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