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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테너 가수 이유선

by 형과니 2023. 5. 1.

테너 가수 이유선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6-02 08:00:53

 

상과(商科) 출신 테너 가수 이유선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끝으로 인천과의 인연은 비교적 짧은 편이나 인천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로 꼽아야 할 전국적인으로 유명한 테너 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1930년대 전반에 이익모(李益模) 주임 목사가 내리(內里) 예배당에 부임했는데 당시 그 댁에 인선(寅善)과 유선(宥善) 형제가 있었다.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나온 내과의사 인선은 학생시절부터 인정을 받아 온 성악 기능을 대성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유학했고, 유선은 연희전문 상과 학생으로 경인간을 기차로 통학하고 있었다. 인선은 광복 후 귀국하여 이탈리아에서 인정을 받은 테너 가수로서 한국에서 최초로 정통 오페라를 상연하는 등 한국 악단을 위해 공적이 컸다. 6·25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애석하게도 40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선은 연전을 나온 후 성악가가 되려는 초지를 관철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졸업 후 미국이 인정하는 테너 가수가 되어 광복 직전에 귀국했으나 태평양전쟁 말기라 평양에서 소리를 죽이고 지냈다. 광복 후 서울로 돌아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테너 가수로서의 악단 활동과 음악에 일생을 바쳤다. 은퇴 후 자녀들이 활동하고 있는 LA로 옮겨 여전히 남가주한인원로음악인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미수를 넘긴 노년을 최신덕(崔信德) 부인과 함께 즐기고 있다. 최 선생은 1930년대 전반에 인천영화여자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인연으로 이화여전의 메이퀸과 테너 가수 유선이 한 쌍의 원앙으로 맺어진 것이다. 인천에서는 최 선생이 부군인 테너 가수 유선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아무튼 인천의 음악을 말할 때 인선, 유선 형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2000년에 펴낸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실려 있는 이인선, 유선 형제에 관한 내용이다. 신 박사의 회고 그대로 이 두 사람은 우리 인천이 자랑할 만하고, 더불어 인천 음악을 말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인물들인데도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그 둘의 인천과의 관련은 물론 행적을 기억하는

 

935.9.20.조선중앙일보 도미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인천시사에도 “5·16 군사 정변 이후 모든 문화 단체가 정비됨에 따라 인천의 음악계도 1962217일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이유선(李宥善)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음악협회경기도지부를 창립하여 활동하던 중.” 운운하는 단 한 구절밖에 없다.

 

물론 그들이 인천에서 생활한 시간이라야 부친인 이익모 목사가 19123월 처음으로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로 왔을 때인 19123월부터 19145월까지 2년여, 그리고 두 번째 담임목사로 부임한 때인 19316월부터 19342월까지의 28개월이 전부로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부친 이 목사가 처음 인천에 왔을 때는 인선이 일곱 살, 아우 유선이 두 살이었고, 두 번째 인천 부임 당시에는 인선은 이태리 유학 중이었고 동생 유선만이 인천에서 연전(延專)을 졸업하고, 그 후 가수 활동을 했던 때였다. 유선이 인천영화학교 교사 최신덕과 결혼한 것이 당시 경인기차 통학생의 대표적 로맨스로 회자(膾炙)됐으니 그나마 인천과 조금 더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오늘 이 글에서는 일찍 타계한 형 인선에 앞서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자리를 차지했던 유선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유선은 1911년 평양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알려진 대로 1928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이어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 1933년에 졸업했다. 이유선이 연전 상과에 다니던 시절에는 당시 교수였던 유억겸(兪億兼)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으로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에 의해 특히 감시를 받던 상황이었다. 특히 이유선은 19311116일 연전학생회가 주최한 연전학생회제8주년기념식의 집회 주동자로서 경찰의 주시를 받기도 했었다.

 

이유선이 음악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것은 그가 배재고보를 나온 후, 또 연전을 다니면서 줄곧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는 사실이다. 아마 배재고보 무렵부터 현제명(玄濟明)의 문하에에 들어가 성악 공부를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래서 연전을 졸업하면서는 더 이상 상과 출신이나 요시찰 인물이 아닌 순수 테너 가수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1935.9.28 독창회

 

그가 얼마나 뛰어난 가수였는지, 1933년과 1934년 무렵 서울의 신문들은 문화란을 온통 그가 출연하는 전국 곳곳의 음악회와 리사이틀 기사로 채운다. 193491일자 삼천리잡지에 실린 樂壇 메리 고-라운드기사에는 23세의 이 청년 테너 가수 이유선을 당시 국내 굴지의 OK레코드사의 몇 안 되는 전속 가수로 소개하기도 한다.

 

 

미국 유학의 길을 택한 것도 국내에서 이처럼 최고의 가수로 절정을 누리고 있었지만 더 높은 음악 공부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세계에 꽃피우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19359월 당시의 신문 조선중앙일보는 그의 미국 유학 송별 독창회를 이런 표제로써 소개하고 있다.

악단(樂壇) 총아 이유선 군 도미 송별 독창회, 27일만 공회당서 개최, 후원은 본사학예부그리고 독창회 다음날 기사에서는 우아한 멜로디에 만당 청중이 도취, 27일 밤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유선 독창회 성황이라고 극찬한다. 그는 이렇게 일단 가수로서의 활동을 접은 것이다.

 

1940American Conservatory of Music 성악과를 졸업한 후 그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3~4년 더 미국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신태범 박사의 기록대로 해방 직전 귀국해 평양에 칩거하다가 해방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 무렵 그에 관련한 기록으로는 문교부, 남녀중등학교 졸업가 제정, 반포라는 1946620일자 조선일보의 기사가 처음이다.

 

“4년 혹은 5개 성상의 형설의 공을 이루고 교문을 나서게 될 남녀중등학교 졸업가가 제정되어 19일 문교부로부터 발표되었다. 이 노래는 이병기(李秉岐) 작사와 이유선 작곡으로 된 것으로 가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그 기사 내용인데 오늘날 칠십 중반 이후 인사들이나 기억할지 모를, 지금은 전혀 불리지 않는 낯선 노래이지만 1절 가사를 옮겨 본다.

 

 

1947.6.28 마라손제패가

 

쇠처럼 구슬처럼 달구고 갈아

나가고 나아갈 길 닳아지도록

영예로운 오늘을 반겨 맞으며

감사의 이 노래를 부르는도다.

 

 

그 밖에 이유선은 ‘8·15평화 및 해방준비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한다. 19468“3천만 겨레의 조선이 해방된 첫 돐을 맞이하여 이 즐거웁고 똑같은 마음으로 거행하고자 군정청 조선인 고관들의 동의로 7일 오후 두 시 교육계 상공계 종교계 군정청 도청 시청 정회 등 각계 대표를 군정청으로 초청하고 8·15평화 및 해방기념준비위원를 조직한 후” 8일부터 준비위원을 선정해 준비활동을 시작하는데 이유선은 스승 현제명(玄濟明) 등과 함께 음악부(音樂部) 준비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어 10월에는 국내 취주악의 확립과 문화 건설을 위하여 취주악운동에 활약하는 각 단체가 한데 모여 전국취주악연맹(全國吹奏樂聯盟)을 결성한다. 그의 연희전문 상과 은사인 유억겸 명예회장을 비롯해 이사장 박태현(朴泰鉉), 상무이사 남궁요열(南宮堯悅), 그리고 이사진으로 자신과 함께 이유성(李有聖), 백영준(白榮俊), 나운영(羅運榮) 등이 참여한다.

 

그는 고려음악협회(高麗音樂協會)라는 단체에도 창립 멤버가 된다. 19473순수한 음악 예술의 연구와 창작 내지 연주를 목적으로 채동선(蔡東鮮), 이흥렬(李興烈), 안병소(安炳昭), 박태현, 박경호(朴慶浩) 등 당대 내로라하는 음악인들과 함께 참여한다.

이유선은 행사나 식전용 노래 작곡에도 뛰어났던지 이 해 3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학생연맹기념대회(全國學生聯盟記念大會)에서 불릴 조지훈(趙芝薰) 작사의 신작 삼일절기념가를 작곡했는가 하면, “씩씩하고 장엄한 철각(鐵脚)의 노래라는 설의식(薛義植) 작사의 손기정 마라손 제패가(制覇歌)’를 작곡하기도 한 것이다.

 

1947.3.1동아일보. 삼일절기념가

 

948년 무렵에는 이화여대 음악과장으로도 재직했던 것으로 기록에는 나타난다. 당시나 지금이나 고액의 사립학교 등록금이 문제가 되어 신문지상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 후 다시 이유선은 1949~1950년 시카고 음대 대학원에 수학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부터 1956년까지 미 극동사령부 문관을 지낸다. 1957년부터 라디오 음악 해설 프로를 맡은 이래 TV와 함께 1989년까지 무려 6천 회에 걸쳐 출연하기도 했다.

 

1960년 대한음악가협회(大韓音樂家協會)가 발족하면서 이사장에 취임했고, 한국음악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예총 초대 부이사장, 한국합창연맹 이사장, 한국성악학회 회장 등 주요 음악 단체의 중책을 역임했다. 중앙대학교 음대 교수, 총신대 종교음악과 창설 교수 역임, 천안 호서대학교 음악과 창설 등 후학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76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기독교음악사」 「서양음악사」 「한국양악80년사」 「화성학등의 수많은 음악 저서를 남겼다. 특히 성가곡 300여 곡과 오페라 17편을 완역했고, 다수의 찬송가, 성가곡 등을 작곡했다.

한국 음악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 우리 인천과 인연을 가진 대음악가. ‘미수(米壽)를 지내고도 건강하게 미국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이 노() 음악가의 그 훗날을 아는 인천 사람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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