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가수 이인선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6-16 16:38:46
의사와 가수를 병행한 형제 테너 가수 이인선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지난 호에 “인천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로 꼽아야 할 전국적으로 유명한 테너 형제 이야기”로 먼저 이유선(李宥善)을 실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형인 이인선(李寅善, 1906~1960)의 음악 인생을 살펴본다. 왜 형제가 뒤바뀌었나 하는 의문을 가지는 독자가 있을 터인데 아우 유선은 전호에서 밝힌 대로 우리 『인천시사』에 이름이나마 언급이 되고 있는 데 반해 형 인선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생소한 이름부터 내보내기 위해 순서를 바꾼 것이다.
▲ 이인선
유선이 연전 상과(商科)를 나와 테너 가수가 됐다면 형 인선은 연전 문과에 입학해 2년을 다니다가 다시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나와 음악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유학을 다녀온 테너 가수다. 두 형제가 천부의 재질대로 애초의 진로를 바꿔 대성한 특이한 음악인들이다. 이런 내력의 뒤에는 형인 인선이 의사의 길을 잠시 보류한 채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용기와 모범이 있었던 것이고, 아우인 유선 역시 뒤에 미국에 음악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의사라면 당시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접과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직업인데 그것을 밀어놓고 음악인의 길을 간 그의 예술적 열정과 용기가 대단하자는 점이다. 1931년 그가 유학을 가기 전 언론인 홍종인(洪鍾仁)이 그에 대해 쓴 그 같은 염려 섞인 평가를 읽어보자.
“이인선 씨 「세부란쓰」에서 의사 공부를 하면서 축음기로 많이 배�다는 재간 많은 테너 가수다. (부츠 부인에게도 지도를 받고 한때는 안기영(安基永) 씨 한데도 배�다지만) 음이 퍽 곱다. 어느 해 가을이엇든가 공회당에서 전문학교 음악대회에 「헨델」의 「라르고」와 또 「리고렛」을 듣든 기억이 깊다. 비전문가이나 실력 이상의 인기를 가진 가수로 그의 장래는 기대할 바 많다. 그러나 지금 세부란쓰 병원 의사로 잇는 그가 어느 정도까지나 더 음악 전문을 할는지.”
이들 두 형제가 인천과 맺은 짧은 인연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여기에 다시 한 번 옮겨 본다.
▲ 1939.5.1 평양독창회
“그들이 인천에서 생활한 시간이라야 부친인 이익모(李益模) 목사가 1912년 3월 처음으로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로 왔을 때인 1912년 3월부터 1914년 5월까지 2년여, 그리고 두 번째 담임목사로 부임한 때인 1931년 6월부터 1934년 2월까지의 2년 8개월이 전부로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부친 이 목사가 처음 인천에 왔을 때는 인선이 일곱 살, 아우 유선이 두 살이었고, 두 번째 인천 부임 당시에는 인선은 이태리 유학중이었고 동생 유선만이 인천에서 연전(延專)을 졸업하고, 그 후 가수 활동을 했던 때였다.”
여기서 인선의 유학에 대해 오류를 집어야 할 것이다. 1934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인선은 당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安炳 王+召), 여류 피아니스트 이애내(李愛內), 그리고 테너 이인선의 유학 기사를 싣는데, 이인선이 1934년 4월 10일에 고별 음악회를 갖고 16일에 이탈리아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다른 백과사전의 기록 오류로 이 같은 잘못 기술이 발생했다. 이 기회에 바로잡는다. 1936년 『삼천리』잡지의 기사도 넌지시 그것을 내보이고 있다.
“안병소 씨 이분은 일즉이 이 땅의 악단에서 그 이름이 높든 천재적 음악가이다. 얼마 전, 음악의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 결심을 품고 멀리 음악의 도(都) 이태리의 미라노로 건너가 방금 연마중에 있는 분이다.
리인선 씨 이분 역시 재작년인가 음악을 더욱 깊이 연구할 목적으로 미라노로 건너간 이후 오늘날까지 꾸준히 배움의 길을 더듬고 있는 전도가 유망한 청년음악가이다.”
결국 이인선은 부친이 두 번째 인천 부임 당시인 1931년에서 1934년까지는 국내에 있었던 것이 되는데, 뒤에 나오는 『대한민국 인사록』대로 세브란스 의전을 막 졸업해서는 세브란스에 있었고, 이어 황해도 황주에서 1년간 개업의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음악인으로 서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부친이 계신 인천에는 아마도 잠간씩 다니러 오는 정도로서 인천과 그다지 밀접한 관련을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1937.6. 12 이인선 동경 독창회
굳이 이인선이 인천에 체재했던 기간을 따진다면 우리 나이 7살부터 9살 때였으니 초등학교 1, 2학년을 다녔을 정도일 것이다. 더불어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부친이 내리교회 담임목사였으니 영화학교를 잠시나마 입학해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시기 이후에는 그 후 부친을 따라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광성고보(光成高普)를 우등으로 마치고 세브란스에 입학하는 과정을 밟는다.
『대한민국 인사록』에는 그의 나이를 “1949년 현재 40세”로 기록하고 있는 점, 출신지를 황해도 ‘황주’로 표기하고 있는 점 등 오류가 보인다. 다만 그의 경력과 활동을 “황주(黃州)에서 일 년간 의원을 개업하다가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음악을 연구한 후 그곳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한 뒤 환국하여 음악 교수 겸 성악연구원을 경영했다. 현재 근민당(勤民黨) 중위(中委)이다.”라고 요약해 놓았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현재 근민당 중위’라는 점이다.
근민당은 1947년 창당된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으로, 참고로 그 정강 초안 서두를 보면 “근로인민당은 세계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을 짊어지고 신국면이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정시하며 우리나라의 건국의 위업을 완미(完味)할 것을 임무로 하여 조선의 노동자 농민 소시민 전 근로 인민과 애국적 정의 인사의 전위 당으로서 창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기본적 정치 노선을 규정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유명 성악인으로서 이름만 올려놓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 1937.8.13 동아
그가 성악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는 유학에서 돌아온 1938년 무렵부터 1940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당시의 신문들은 이 무렵 동안 성황을 이룬 서울, 평양, 단천 등지에서의 수차례에 걸친 국내 활동과 도쿄(東京), 베이징(北京)에서 찬사를 받은 그의 해외 독창회 개최 기사를 싣는다.
1941년 『삼천리』잡지가 실시한 조선음악학교 설치론(朝鮮音樂學校 設置論)이란 설문 조사에서 이인선은 자신의 음악 교육관을 피력한다.
“학무 당국에서도 이미 음악의 정서 교육상 필요를 통감하여 중등학교에 음악 과정을 필수 과목의 일(一)로 편입시켰고 또 음악학교 창립설이 이미 있었던 만큼 동교 창설의 필요를 이제 새삼스럽게 논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현하(現下) 조선교육계를 전망컨댄 문, 상, 법, 의, 공 등 각 방면의 전문 교육기관은 거의 다 완비되어 있다 할 수 있으나 오로지 음악만은 완전한 교육기관이 1개도 없음은 숙지하는 바요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음악이 정서교육상 불가결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일보 더 나아가서 이 음악이야말로 때로는 정의와 인도의 예리한 칼도 될 수 있고 밀려오는 천병(千兵)과 만기(萬機)를 능히 무찌를 수 있는 단결과 애국의 정신을 고무 내지 배양시키는 최량의 배양기(培養基)도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시인한다면 하루 바삐 시국에 적합한 음악인의 양성을 위한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때야 말로 내지(內地)에 있는 음악학교는 별개로 치고 조선에도 1교쯤 은 설립하여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이 같은 주장과 함께 교수진용에 대해서도 그는 “적어도 각과에 있어 교수의 1인쯤은 사도(斯道)의 권위자로 택함이 적당할 줄 믿습니다. 비단 조선 내에서만 교수를 구할 것이 아니라 일본 우(又)는 동맹국에까지 널리 손을 뻗혀 적임자를 구함이 학교의 장래와 결과에 있어 좋으리라고 믿습니다. 일례를 들어 제 개인의 의견을 말하자면 적어도 기악과 성악에 1인식(式)은 구라파 계통에서 상당한 교수를 초빙하되 피아노, 바이올린 등에는 독인(獨人) 교수, 성악에는 이태리인 교수를 초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고 과감한 주장을 한다. 당시로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밖에 단편적인 기록으로 이인선은 1946년 6·10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영화동맹(朝鮮映畵同盟)과 예술통신사(藝術通信社) 공동 주최한 기념 행사에 무용가 조택원(趙澤元),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등과 출연하는데 이 행사에서 그는 「안다루지아의 노래」 「그대만을 위하여」를 독창한다. 1948년에는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각계 인사 500명과 함께 참가하기도 한다.
▲ 1937.12.2 동아 의사개업
이인선은 특히 우리 음악사에 기록될 ‘오페라운동’을 벌인 선구적 인물이다. 한국 최초로 국제오페라사를 설립해 1948년 서울 시공관에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직접 번역하고, 주연을 맡아 공연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1950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카르멘」을 공연했다. 6·25가 발발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외과의사로 있으면서도 1953년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는 미국에서 우리 민요를 번역, 소개하는 일에도 힘썼다. 1960년 3월 아깝게 50대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1년 12월 21일 YWCA 강당에서 40여 문하생들이 주최한 고인을 추모하는 추도음악회가 가수 한경진, 오현명 등과 정진우, 박정윤 등의 피아노 반주로 개최되기도 했다.
2003년 지식산업사에서 간행한 한상우는 저서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들을 펴냈다. 거기 수록된 인물 중에는 많은 이 땅의 음악인들과 더불어 이인선, 이유선 형제도 들어 있다. 우리가, 우리 인천이 기억하고 싶은 음악 선구자들! 이렇게 조용히 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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