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생이』로 햇빛 본 현덕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7-14 07:22:52
“현덕을 대부도 출신이라고 말하지만 본래는 1912년 서울 삼청동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자, 현덕은 대부도 당숙의 집에 보내져 소년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문에 그를 대부도 출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남생이』로 햇빛 본 현덕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 현덕얼굴
대부도에서 인천으로 나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중등학교 속성과 1년을 거쳐 명문인 제1고보에 입학했으나 1년여 만에 자퇴한다. 그 후 공사판 인부로, 부두 막노동자로 전전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 배달, 페인트직공 등 닥치는 대로의 품팔이 노동으로 최하층 생활을 하다가 1930년 중반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 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남생이가 당선되면서 장안의 화제를 일으켰다. 안회남(安懷南)은 ‘남생이는 현 문단의 최고 수준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박태원(朴泰遠)은 ‘이 작품 앞에서 우리는 한껏 부끄럽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며, 김남천(金南天)은 단편집 『남생이』의 발문에서 ‘경이적인 신인의 출현’이라고 극찬했다.
해방 후 그는 단편집 『남생이』, 소년소설 『집을 나간 소년』 등을 펴내며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했으나 끝내 이념의 싸움에서 월북의 길을 택했고, 그의 작품집들은 금서로 묶이는 비운을 맞았다가 1988년에 이르러서야 해금됐다.
김동석, 현덕 등은 암울했던 일제 말기와 해방의 혼란 속에서 인천문단을 빛냈고 예술인들의 긍지를 드높이는 데 크게 활약했던 사람들이다.”
이 글은 인천예총에서 펴낸 『인천예총50년사』에서 발췌한 현덕에 관련한 내용이다. 인천이, 인천부두가 낳은 소설계의 총아 현덕의 등장을 당시 내로라하던 문인들이 극찬으로 기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소설『남생이』가 당시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현덕(玄德, 1909~?)의 본명은 현경윤(玄敬允)이다. 출생이 1909년 알려져 있는데 『인천예총50년사』는 그보다 3년 늦은 1912년생으로 기록한다.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는 1909년생이다.
▲ 19391.16 동아일보 현덕 동화
2007년 인천문화재단에서 ‘인천문화 대표 인물 조명 사업’으로 그의 탄생 98주년을 기념해 「노마와 떠나는 동화 여행」특별전을 기획하기도 하는 등 현덕에 대해서는 근래 아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고 그 성과도 상당한 집적이 있어 이 지면에서 더 덧붙일 것은 없을 듯 싶다.
그러나 굳이 그에 대해 기록하는 까닭은 그가 우리 1920, 30년대 ‘인천항을 배경으로 그 언저리에서 펼쳐지는 인천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냈던 인천 작가임’을 주지시키고 싶어서다.
현덕이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고무신』이 가작으로 뽑히면서다. 그 후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을 만나면서 문학에 전념해 마침내 1938년 출세작 『남생이』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다.
등단 이후 2년 동안 현덕은 본격적으로 소설과 동화를 발표한다. 그때 발표한 작품이 단편소설 8편과 40여 편의 ‘노마’ 연작 동화, 그리고 10여 편의 소년소설이다. 소설이든, 동화든, 그리고 소년소설이든 그의 작품 전반에는 『남생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게 배어 있다. 그럼에도 같은 경향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나 구인회(九人會) 같은 문학단체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특이한 것은 1940년 이후에는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않은 점이다. 그 이유가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1945년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출판부장을 맡아 소설 및 아동문학분과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에도 참여한다.
▲ 1939.3.5 동아일보 현덕 동화
“2월 9일 오후 1시부터 국립도서관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날 간담회에 오른 사항은 조선 소년운동의 금후 전개와 지도단체조직과 금년도 어린이날 준비에 관한 것을 토의한 결과 중앙기관을 조직한 후 지방적으로 세포 단체를 조직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후 조선소년지도자협의회 조직을 목표로 각 방면을 망라한 조직준비위원을 선거하게 되었으며, 금년도 어린이날 준비에 대하여서는 조선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준비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위의 글은 1947년 2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현덕이 참가했던 ‘소년운동자 제2차 간담회’ 내용이다. 양재응(梁在應), 남기훈(南基薰), 곽복산(郭福山), 최청곡(崔靑谷), 윤석중(尹石重), 금철(琴徹), 김영수(金永壽) 등과 조선소년지도자협의회 조직준비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는데, 이 가사를 통해 그가 아동문학가로서 ‘어린이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음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회 활동 재개와 더불어 현덕은 과거 발표했던 작품들을 묶어 1946년 소년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과 동화집 『포도와 구슬』을 발간하고, 이어 1947년에 소설집 『남생이』와 동화집 『토끼 삼형제』를 간행한다.
특별하게 주목할 만한 정황이나 자료가 남겨진 것은 아니나, 작품활동의 긴 침묵 끝에 이처럼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작품집으로 엮은 현덕의 행동은 아마도 남(南)에서의 마지막 자신의 문학 인생을 정리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950년, 6·25전쟁 중에 그는 월북한다. 그리고 1951년 종군작가단에 참여한다. 지금 살아 있을 리 없겠지만, 그 이후 현덕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북한에서 남긴 작품집으로는 단편집 『수확의 날』이 있다.
그가 북으로 가고 남에서는 그의 작품에 족쇄가 채워진다. 자유신문 1951년 10월 5일자는 “공보당국에서는 6·25사변 전 월북작가 38명과 6·25사변 후 월북작가 24명의 작품은 이미 간행된 작품에 대해서는 발매금지 처분을 내리는 동시에 차후에도 문필 활동을 금지시키기로 하는 한편, 사변중 납치, 행방불명 등 여러 가지 사유로 소식이 없는 12명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내용을 검토하여 처리하도록 공보·경찰 등 말단 행정기관에 통첩하였다는 바 그 해당 작가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고 전한다.
▲ 1932.2.10현덕 동화 동아일보
여기에 임화(林和), 김남천(金南天), 안회남(安懷南), 이태준(李泰俊), 한설야(韓雪野), 홍명희(洪命熹), 조벽암(趙碧岩), 오장환(吳章煥), 박팔양(朴八陽), 박아지(朴芽枝), 함세덕(咸世德) 등 한국 문단의 ‘별’들과 함께 38명의 A급 월북 작가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그래. 김동리(金東里), 현덕 같은 분은 누구보다도, 우린, 좋은 작가적 소질을 가졌다고 봐.”라던 소설가 최정희(崔貞熙)나, “현덕 씨라는 분이 퍽 재주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생이」나 그 이후로 나온 작품들이 모두 몹시 애쓴 흔적이 있더군요. 처음 나온 작가지만 그 문장을 보아서 전부터 많이 준비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한 이태준의 상찬(賞讚)이 오늘 오히려 더 덧없다.
현실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함께 그 명암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던 작가. ‘인천부두’가 낳은 인천 소설가 현덕을 기억하며 분단 현실의 아픔도 더불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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