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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제물포청년회 멤버 장건식

by 형과니 2023. 5. 11.

제물포청년회 멤버 장건식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7-30 10:44:50

 

제물포청년회 멤버 장건식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장건식(張健植)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인천에 거주하면서 벌인 활동이나 그의 신상 등에 관련해서 아주 빈약한 양의 정보밖에는 없다. 더구나 인천에서 활동이라는 것도 단 한 줄의 언급으로 인천의 옛 원로들, 고일(高逸) 선생이나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산문 속에서나 발견될 뿐이다. 물론 인천시사에도 다소의 언급이 있기는 하다.

 

제물포청년회에서 만든 기관지 제물포에는 이길용(李吉用), 송건우(宋健雨), 장건식(張健植), 고일 등이 정력적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활동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인천이 한 지역의 큰 도시로 형성되면서 처음으로 문화적 활동의 싹을 보여주었다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겠다.”

 

1955.2.28

 

 

이것이 시사 문학편에 나와 있는 장건식에 대한 내용의 전부이다. 이런 까닭에 그를 인천의 문화 예술인 부류에 넣을 수 있을지 적이 의심스럽다. 시사나 인천 원로들의 글에 의해 미미하면 미미한 대로 그의 활동이 초기 인천 문학 운동에 한 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인정이 되나,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로서도 후일의 그는 문학인, 또는 예술인으로 살지 않았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넓게 보아 우리 인천을 연고로 활동했던 인천 인물에 대한 조명, 그리고 신문학 여명기 인천에서 소박한 대로 문학 활동을 했던 선구적 인물에 대한 몇 줄의 기록이나마 남겨 기억하려 한다는 차원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가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야구팁 한용단(漢勇團)을 결성하고 한편으로는 문예동인지를 펴내기도 했다. 문예부에는 정노풍(鄭盧風), 고유섭(高裕燮), 이상태(李相泰), 진종혁(秦宗赫), 임영균(林榮均), 조진만(趙鎭萬), 고일 등이 있었고, 뒤따라 따로 조직된 제물포청년회(濟物浦靑年會) 이길용(李吉用), 이건우(李建雨), 장건식, 고일의 동인지 제물포와 함께 문학 수련의 길을 개척했다.”

 

이것이 신태범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또 다른 신 박사의 저서 인천 한 세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싣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길용(동아일보 발간 때의 체육부장), 고일(시대일보 기자, 인천석금의 저자), 송건우(조선일보 기자), 장건식(국방부 차관) 등이 제물포청년회를 조직하여 동인 잡지 제물포를 간행했고,

 

굳이 같은 내용을 인용한 것은 장건식이란 이름 뒤의 괄호 안에 든 직책 때문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같은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다른 경로의 조사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1950년대에 발간된 고일 선생의 저서 인천석금에도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인천공립보통학교는 학교 이름을 동명에 따라 창영(昌營)심상소학교로 고쳤다가, 광복 전에 창영국민학교로 다시 변경한 것이다. 일본인 최후의 교장은 지전(池田)’이었고, 광복 후 오늘까지 조석기 씨가 교장을 맡고 있다. 이 학교는 현존하는 국민학교 중 가장 역사가 오래며, 수재와 중견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벌써 졸업생으로 60이 훨씬 넘은 이가 많이 있다.

 

고주철 씨와 같은 노의사,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 평론가인 개성 박물관장 고유섭 군, 육법전서를 모두 암송한다는 천재이자 일제 때 부장 판사로 일본의 고문(高文)을 통과한 전 법무부장관 조진만 군, 한때 은행의 사환이었다가 상해로 건너가 공부해 영어에 능통한 장건식 국방차관보도 있으며, 그밖에 예술가, 학자, 사업가, 체육인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다소 길게 인용한 것은 그가 오늘의 인천창영초등학교를 나온 인천 인물이라는 점, ‘한때 은행의 사환이었다가 상해로 건너가 공부해 영어에 능통했다는 점,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국방차관보를 지냈다는 점 때문이다. 신 박사는 국방차관’, 고일 선생은 차관보로 달리 표기하고 있는 점도 확인이 필요하다. 그가 국방 관련 고위직을 지낸 것은 당시의 신문 기사가 증명한다.

 

1952226,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당시 국방부 제 6국장이던 장건식 준장을 예편과 동시에 국방부 재정담당 차관보에 임명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해 7월에는 차관보로서 미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장건식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리고 있는 것이라면 대한민국건국십년지의 기록이다. 거기에는 그가 1904212일생(몰년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이며, 본적지는 경기도 개성, 그리고 그의 학력은 중국 상해 호강(?)대학교 졸업으로 되어 있다. 경력은 국방부 제5국장과 이재(理財)차관보 겸 국방부 경리국장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분 원로의 기억이 거의 맞는 것이다.

 

1955. 7. 5 동아일보

 

장건식의 가계(家系), 인천에 이주한 연유, 창영학교 졸업 이후 상해로 간 경위, 귀국 후 직업, 경력 등이 연도 간격이 크고, 또 어떤 것은 전혀 미상하거나 아주 단편적이어서 그의 일생을 종합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우선 그는 1925년 무렵에는 상해에 유학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상해총영사 시전칠태랑(矢田七太郞)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上海事件에 대한 不逞鮮人後援狀況이라는 보고서에 장건식의 이름이 올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건식은 은행에 하급 고용인으로서 근무하면서 한용단의 회계 책임자(1921), 그리고 제물포동인지 발간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이내 상해로 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귀국해서의 행적이라면 19318월 잡지 동광버드나무 그늘 - 조그마한 국제경기라는 수필을 발표한 것이 유일하게 보인다. 당시 그는 텍사스회사에 적()을 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텍사스석유회사인지 모르겠다.

그의 애국심과 새로운 상업 거래 제도에 대한 계몽 정신이 깃든 수필을 원문 그대로 옮겨 본다. 경제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수필류의 글은 드문드문 발표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5개 민족이 합작 근로하는 외국인 商館에 잇는 몸이 되어 사내의 공기와 거래처와의 관계가 유달리 특수하고 묘미한 점이 많음을 느낌니다. 첫재로 우리는 (몇몇 사우도 포함) 국제 경기장에 조선을 대표하야 나간 선수와 같은 책임감을 잊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슨 실수나 불명예한 일을 할 때에 웃사람된 이는 이모, 김모하는 이보담 조선사람이라고 총괄적 평가를 하기가 쉬운 탓입니다.

 

상업 거래 상대자도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이 모다 잇어 거래선상에 비치는 특징이 各異합니다. 남의 비판은 부지러운 일이요 우리 상인의 대체적 비판을 한다면 대략 이럿습니다.

 

小捨大取主義한 것. 이것은 常語() 주고 말() 박기를 실용 안하는 것입니다. 망둥이를 잡으려면 갯지내를 희생시키고 鯉魚를 위하야 새우를 버리는 것이언만 우리는 목전의 小利를 버리기 아까워 싸우되 깊숙히 잇는 大利를 못 보는 감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豪商이라고 지명할 사람이 적습니다.

 

신용이 박약한 경향이 많습니다. 물론 물질적 여유가 없는 우리로서 본의 아닌 불신용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겟지만 궁박한 면담을 일시라도 회피하기 위하야 善美한 약속을 남기고 헤진 뒤 이행이 없습니다. 당장에 벼락이 나려도 될 건 된다 안될 건 안된다 햇으면 속이 씨원하겟습니다.

 

사대주의가 보입니다. 투자액에 비하야 시설과 설계 몽상이 과대하야 결국 운전을 못하고 단명하는 예가 많습니다.

단점만 열거하야 미안합니다. 그러나 장점을 자랑하기 전에 약점을 고치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 상인 중에 다른 이의 규범될 만한 우월한 분도 많습니다만 대체로 보아 우리는 굳센 근기 잇는 상업가가 소수임을 항상 한탄합니다.”

 

이후 대뜸 1937년 삼환상회주식회사(三環商會株式會社)자전거 및 그 부분품 판매, 전항에 부대하는 일체의 업무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의 이사라는 직책도 보이는데, 아무튼 한용단에서의 회계책임자, 그리고 외국인 회사 근무, 그리고 1946중국과 무역협정 예비 교섭을 위해 미군정이 무역 협정 예비교섭을 위해 중국에 4명의 대표를 파견하면서 민간인 3인 중에 대한상사 기획부장 장건식을 선발한 점 등은 그가 일찍부터 경제 분야에 밝았던 인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그가 언제 어떤 경로를 밟아 군 장성이 되었고, 국방부 고위 요직에도 오를 수 있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지금 우리는 옛날 제물포청년회의 역사를 더 이상 전해들을 수 없고, 또 그들이 내던 동인지제물포를 볼 수도 없다. 더구나 장건식에 대해서도 역시 자료의 소루로 말미암아 많은 부분 공백이 되고 있다. 그가 인천의 문학인, 예술인은 혹 아니더라도 인천 사람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창영학교나 국방부에 그에 관련한 자료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인천 인물사의 블랭크를 전문가 어느 누구가 빨리 메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