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시대』 소설가, 엄흥섭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8-26 00:10:12
또 한 명의 『습작시대』 소설가, 엄흥섭
김윤식 시인·인천문협 회장
소설가 엄흥섭은 우리 인천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천에서 발간된 문학동인지 『습작시대』에 참가했던 것은 물론, 광복 직후 창간된 인천의 대중일보(大衆日報)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인천문학가동맹(仁川文學家同盟)을 결성해 위원장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 1925 엄흥섭 시
이런 엄흥섭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가 월북 작가여서 그 동안 그에 대한 연구와 접근이 차단됐었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되고 있고, 그 성과가 점차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인천시사』에도 전일(前日)의 금기(禁忌)에 때문인지 그의 문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이 이름자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문학적 습작 활동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우촌(秦雨村)의 주도 아래 『습작시대』가 만들어졌음은 이미 언급했거니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소설가 엄흥섭(嚴興燮) 등 다수의 문인들이 여기 기고하고 있었다.”
“진우촌은 문예지 『습작시대』를 인천에서 발행했는데 박아지(朴芽枝), 엄흥섭 등이 호응하였고, 김도인(金道仁)이 그 후에 종합 문예지 『월미』를 펴냈다.”
위에 인용한 글은 『인천시사』에 나와 있는 것이고 아래의 것은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에 실린 내용이다. 『습작시대』는 1927년 2월 인천의 진우촌, 한형택(韓亨澤), 김도인(金道仁) 등이 발간한 인천 최초의 문학동인지인데, 소설가 엄흥섭이 이 『습작시대』에 참가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엄흥섭의 참가는 카프 문학을 지향하는 동인의 성격이나 이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학교 때부터 ‘자유주의적 진보 사상을 가진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이희환,「엄흥섭과 인천에서의 문화운동」에서 인용)는 그 자신의 술회와 함께 전반적인 엄흥섭의 작품 경향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더불어 같은 또래인 진우촌, 박아지, 김도인 등과의 매우 두터웠던 인간적 관계도 참가를 더욱 거들었을 것이다.
1933년 민병휘(閔丙徽)가 쓴 「문단의 신인·캅프」라는 글에 그러한 정황이 언뜻 비치고 있다.
“김병호(金炳昊) 군을 맛난 것은 1927년이엿든가 십다. <중략> 그리든 참에 어늬날 송도의 이성득(李聖得) 형이 진종혁(秦宗赫) 우촌(雨村) 군이 나를 찻는다는 바람에 이 형이 일러준 북본정인 최응렬(崔應烈) 씨 댁으로 갓다. 그때에 아나키스트의 타입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 군이엿고 여성적으로 생긴 사람이 진 군이엿다. 그들은 창작가 엄흥섭(嚴興燮) 군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왓다는 것이다.”
▲ 930.4.22. 엄흥섭 프로문학
『습작시대』는 2호와 3호가 발간되면서 전국 각 지역의 ‘프로문학 확산의 첨병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들 동인이 내세운 ‘습작시대’라는 잡지 이름처럼 아직 문인으로서 확고한 위치나 이름을 얻기 전인, ‘문학도’의 시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1937년 엄흥섭은 동아일보에 쓴 회고기 「나의 수업시대-작가의 올챙이 때 이야기」에 『습작시대』참가 전후의 사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학우문예(學友文藝)의 원고의 8할은 조선문(朝鮮文)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가명으로 소설도 쓰고 제법 건방지게 권두 논문도 썼다. 학우 중에는 불행하게도 요절한 사람이 생기자 우리 편집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그 학우의 추도 특집 원고를 만들어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인천의 진우촌, 한형택, 김도인 제군과 손을 잡고 『습작시대』란 동인지를 비로소 문단에 내놓았다.그때 동인은 우리 외에도 유도순(劉道順), 박아지, 양재응(梁在應), 최병화(崔秉和), 염근수(廉根守) 제군이었다. 그때 나는 소설 「국밥」 시 「바다」를 발표했다. 『습작시대』는 3호까지 나오고 몇 달간 못 나오다가 공주(公州) 윤귀영(尹貴榮) 군의 힘으로 『백웅(白熊)』이 나왔으나 또 못 나오게 되었다.
곧 뒤이어 나는 진주(晋州)서 『신시단(新詩壇)』이란 시가동인지(詩歌同人誌)를 만들었다. 이때 동인은 김찬성(金贊成), 김병호, 박아지 제군이었다.”
그의 초기 문인 활동은 일단 이렇게 인천의 동인지 『습작시대』 참가를 시발로 해서 다른 여러 동인지 활동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소설 「국밥」 시 「바다」를 『습작시대』에 발표했다’고 썼는데 그것은 착오라는 점이다. 아마 10년이 지난 1937년의 회상이어서 그 스스로도 착각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가 창간호에 발표한 시는 「내 마음 사는 곳」이었다. 아울러 소설 「국밥」의 발표 지면도 이희환은 2호로 추정하고 있다.
▲ 1930. 9. 26 엄흥섭 동요
아무튼 이것이 엄흥섭이 인천과 맺은 첫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습작시대』동인 시절에는 경남 진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 교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이주해 소설 창작에만 전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이주 직후 그는 ‘카프(KAPF)’에 가입했고 ‘카프 개성지부 사건’ 등을 겪은 뒤 독자적 문학 행보를 걷는다.
그가 인천과 더욱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은 아마도 이 무렵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단편 「새벽바다」, 중편 「고민」, 장편 「정열기(情熱記)」등 인천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이 시기 이후에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인천 문인 김도인 등과 어린이 잡지 『별나라』를 통해 같이 활동하고, 또 1937년 김도인이 발행한 잡지 『월미』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이 무렵 그의 거주 상황 등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인천을 각별하게 생각했거나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적어도 광복 무렵에는 인천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하게 된다. 이희환 역시도 비슷하게 그런 가정(假定)을 제시하지만, 그가 인천에 터를 잡지 않았다면 광복 직후 인천의 문학 단체의 장(長)이나 인천의 신문사 편집국장 같은 직책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점이다.
앞서 말한 대로 엄흥섭은 1945년 10월 인천에서 창간된 대중일보 편집국장이 된다. 그리고 11월 28일에 있었던 인천기자단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이어 12월 18일에는 인천문학가동맹(仁川文學家同盟) 위원장이 되고, 이듬해 3월 1일에는 대중일보를 사임하고 새로 창간되는 인천신문(仁川新聞) 편집국장으로 옮겨 앉는다.
그가 인천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겪은 유명한 필화사건이 『인천시사』에 보인다. 좌익 성향의 신문과 미군정의 충돌인 것이다.
▲ 1937. 7. 30. 엄흥섭 수기
“당시 좌익세력이 강했던 인천에서 발행된 만큼 논조에 있어 좌경화의 색채가 강했다. 특히 창간 한 달여의 1946년 5월 7일자에서 인천시청의 적산과장에 대한 허위 보도 및 명예훼손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동월 11일에 공무국 직원에다 서울신문 특파원 등 대거 40여 명이 검속되고 그 중 간부급은 군정재판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이것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첫 필화 사건으로 기록되는데 이 즈음이면 미군정 비방과 파괴 선동에 대한 탄압이 서서히 강화되는 때이다.”
이후 1947년 7월, 엄흥섭은 서울의 제일신문(第一新聞)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이 신문도 좌익 성향이 강해 역시 필화사건을 겪게 되고 마침내는 1949년 11월까지 1년여의 수감생활까지 하게 된다.
이런 그의 행보와 성향이 마침내 그를 월북으로 귀착시켰을 것이다. 그는 1951년 6·25전쟁 중에 월북한다. 그 후 북에서 중견 작가로 활동해 오다가 “1965년 『조선문학』에 수필을 발표한 이후 더 이상 북한의 지면에서도 그 이름과 작품을 남기지 않고 있는” 상태다.
엄흥섭은 1906년 충남 논산군 채운면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가 살고 있던 진주로 이주해 숙부의 보살핌 속에 1929년 진주 소재 경남도립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정식 등단은 1929년 『조선문예』 1호에 시 「세 거리로」와 1930년 『조선지광』에 단편소설 「흘러간 마을」을 발표하면서였다. 그는 ‘동반자적 경향의 현실 참여와 계급주의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의 모태가 되고 배경이 됐던 인천항--반세기도 전, 그가 걸었을지도 모르는 부둣가와 월미도 길, 중앙동, 신포동, 내동 거리를 걸으며 그가 우리 인천과 맺었던 문학적, 인간적 인연을 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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