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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임창복 -연극단체 칠면구락부 멤버

by 형과니 2023. 5. 13.

임창복 -연극단체 칠면구락부 멤버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9-10 00:21:18

 

연극단체 칠면구락부 멤버 임창복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인천의 신예술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이다. 1920년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가 처음으로 한국인 야구팀 한용단(漢勇團)을 결성하고, 한편으로 정노풍(鄭盧風), 고유섭(高裕燮), 이상태(李相泰), 진종혁(秦宗赫), 임영균(林榮均), 조진만(趙進萬), 고일(高逸) 등이 문예부 활동을 한 것이 새로운 문예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뒤따라 조직된 제물포청년회(濟物浦靑年會)의 이길용(李吉用), 이건우(李建雨), 장건식(張健植), 고일 등이 동인지 제물포를 발간하면서 문학 수련의 길을 개척한다. 이런 문화 활동의 태동에 따라 연극 운동도 일어나는데 그것이 곧 칠면구락부의 탄생인 것이다.

 

인천의 극() 연구와 공연 단체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칠면구락부의 출현이다. 그 부원은 비록 몇몇 동호인이었으나, 인천 연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토월회의 무대 장치가 원우전(元雨田), 노련한 영화배우이자 연출자인 정암(鄭巖), 극작가 진우촌(秦雨村)과 그 외 임창복(林昌福), 임영균, 한형택(韓亨澤), 김도인(金道仁), 필자 등이 간부진이었다. 칠면구락부가 조직되기 전의 인천 연극 운동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별다른 목적의식이 없이 이따금 청년들에 의해 공연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중략>

 

칠면구락부에서는 진우촌이 각색하여 공연한 춘향전」 「칼맨」 「사랑과 죽음이외에 수많은 작품을 각색, 연출하였다. 무대 장치는 원우전, 연출은 정암, 각색은 진우촌과 필자가 담당했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작품인 눈물의 빛가무기좌(歌舞技座)’에서 공연할 때, 주연 송수안(宋壽安) 군이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고, 무대 뒤로 숨은 일이 있었다. 각 신문사가 후원한 만큼 입추에 여지없는 초만원 속에 첫 막을 열었었다. 진우촌이 배경 뒤에서 극본을 크게 읽어 주었건만, 송 군은 입을 열자마자 첫 마디가,

 

여보게, 변소가 어딘가? , 소변 좀 보고 옴세.’

송 군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져서 영영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대역을 맡아 본 필자는 하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시국 강연을 한바탕하였고, 노파 역으로 분장한 임창복 군을 나오라고 독촉해 전혀 다른 내용의 희극을 연출하고만 일까지 있었으니 그립기도 한 낭만적 시절이 아니던가 싶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칠면구락부 창립 멤버이기도 했던 고일 선생이 자신의 저서 인천석금에 기록한 내용이다. 초기 인천 연극 운동의 중심이었던 칠면구락부의 왕성한 활동과 함께 그들이 펼쳤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미소를 짓게 한다.

 

이 칠면구락부는 엄밀한 의미에서 극예술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지적한 대로 애호와 계몽의 수준 정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들 칠면구락부 7명의 젊은 멤버들이 초기 인천 연극 운동의 개척자들이었다는 데에는 이의를 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인천 신연극 운동의 첫 횃불을 든 선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임창복도 그 멤버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인천석금외에는 그의 연극 활동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인천시사에도 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고, 신태범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만이 그가 칠면구락부 회원이었으며, 학생시절 정구 선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인천 문화 예술계에 그의 이름이 묻혀 버린 데에는 그가 일찍 연극 관련 활동을 접은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1923년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유학을 떠난 듯하다. 전후(前後)의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동아일보는 그가 상하이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테니스 국제 시합을 가진 사실을 크게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으로 인천 경구계(硬球界)에 유일 선수 임창복 군은 방금 상해 진단(震旦) 대학 예과에 재학중인데 4일 본사 인천지국 경기계(競技係)에 도착된 전신(電信)에 의하면 임 군은 거월(去月) 22일 하오 2시 재상해(在上海) 각국인(各國人) 전문학교 선수권 경구경기에 우승한 아메리칸 칼레지()과 단시합(單試合)을 하게 되었다 한다. 임 군은 여정(旅程)의 노독(路毒)으로 각기(脚氣)가 아직도 쾌()키 전이었건만 선명한 회선상(灰線上)에는 조선인 대 미국인의 경기 같은 관중의 시선을 이끌었었다 한다.”

 

上海 硬球 競技 - 同胞11라는 1923107일자 동아일보 기사 전문이다. 첫날인 922일에 그가 거둔 성적은 단식 12, 복식 13패였고, 다음날인 923, 상해시 유일한 강팀이라는 남양대학(南洋大學)과의 경기에서는 단식 첫 세트를 듀스 끝에 1210으로 따내는 등 선전한 기사를 싣고 있다. 경기 결과 총 전적은 단식 12, 복식 전승이었다.

이런 것들이 육체적인 무리였던지 임창복은 얼마 가지 않아 귀국하고 만다. 그해 1124일자 동아일보는 그가 신병으로 그곳 세인트 마리아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1일 귀국, 내리(內里) 자택으로 귀환해 요양 중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이다. 각기병이라면 더더구나 테니스와도 작별을 고한 듯하다.

 

 

1923.11.24 임창복 귀환

 

 

그 후의 그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 유학을 마쳤는지, 국내에서 학업을 계속했는지 불명이다. 그는 동료들이 흔히 종사했던 직업, 신문기자 노릇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방면의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남아 있어 당시의 언론인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데 그의 이름은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실업계 쪽으로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7년에 강화 선원면에 설립된 삼신기선(森信汽船)의 이사로 등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회사의 창립 사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통학생 시절에 몸담았던 연극이나 문화예술 분야와는 완전히 거리를 둔 채 실업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가 재직했던 회사로는 그 외에도 내리(內里)에 있던 대양상회(大洋商會)가 있다. 이 회사는 1935년에 설립됐는데 석유 및 기타 유류 판매 발동기 및 기타 기계류 판매, 고무제품, 보험대리업, 화물자동차 운수업, 미 잡곡 무역, 위탁매매, 비료 농공구 판매, 이상 각항에 관한 부대 업무를 사업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종합무역상사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가 이 회사에 재직한 기간 역시 확실하지는 않으나 1937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에는 노무 담당 이사로 등재돼 있는 것이다. 앞의 삼신기선은 설립연도가 1927, 그리고 이 회사는 1935년으로 산술적으로 8년의 차가 있고, 조사 시점은 앞의 회사가 1933, 그리고 이 회사가 1937년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모두 조사 시점 현재의 회사 자본금, 설립일, 중역명단 등 주요 사항들만을 개괄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가 두 회사에 각각 언제 입사해서 퇴사했는지, 근속(勤續) 연수는 얼마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에 관련한 기록이나 정보는 여기서 끝난다. 앞서 말한 대로 인천시사에도, 상공회의소 쪽 기록에도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그에 대해 구전(口傳)이나마 전할 인물들마저도 거의 생존해 있지 않다. 임창복의 영식으로 유명한 미학자이면서 국립현대미술관장이었던 임영방(林英芳) 교수가 있으나 이분 역시 출향인사이면서 또 팔십 고령이다.

 

불과 한 세기 전, 20세기 초에 태어나 활동하던 우리 직전 세대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나 증언이 이처럼 적막하리만치 희소하다. 우리 인천의 문화예술사를 이렇게 공소(空疎)한 채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비록 한때의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임창복을 비롯한 인천 신연극 운동의 시발이었던 칠면구락부와 그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 후학들의 당연한 책무다. 더불어 임창복이 여장(女裝)을 하고 무대에 섰던 그 가무기좌터에 칠면구락부 표지(標識)라도 세워 선인들을 기념하는 일이 문화 도시를 지향하는 인천의 진정한 면목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