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강성렬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10-06 01:02:46
희미하게 이름이 남은 인천 연극인 강성렬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혁신단> 임성구 일행이 애관의 전신인 <협률사(協律舍)>에서 신파 연극을 공연한 것이 45~6년 전의 일이다. 그 후 김도산과 <취성좌(聚星座)>의 김소랑 등이 나타났다. 신극 <토월회>의 출연은 근 30년이나 되는 것 같다. 임성구의 연극에 심취한 인천 소년 강성렬은 후에 <취성좌> 무대에 나타났고, 인천 권번 기생들이 총동원되어 <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공연할 때 무대감독을 맡았다. 그는 기생 일점홍(一点紅)과 눈이 맞아 행방을 감춘 일까지 있었다.”
이것이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에 보이는 인천 연극인 강성렬(康成烈)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내용 말고는 인천 연극에 관련한 다른 어느 기록물에도 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인천시사』 연극 편에도 강성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인천에 남은 거의 유일무이한 기록이 아닐까 싶다.
『인천석금』이 출간된 해가 1955년이고, 집필은 그 전해에 이루어졌으니 인용한 글 가운데 “45~6년” 전이라고 한 시기는 1908~9년 무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임성구의 연극에 심취한 인천 소년 강성렬”이란 구절로 미루어 그 당시 강성렬은 대략 15~6세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강성렬의 출생 시기는 자연스럽게 1890년대 초반으로 상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인천석금』은 강성렬이 “후에 <취성좌> 무대에 나타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시기적으로 적어도 1918년 이후가 될 것이다. 김소랑의 <취성좌>는 1918년 2월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무대에 나타났다”는 것은 무대 연기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고일 선생의 말대로 ‘연극에 빠진 소년 강성렬’이 서울로 가 <취성좌>에 입단함으로써 배우의 길에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권번> 기생들이 총동원되어 <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공연할 때”의 시기도 1930년 이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목조 극장은 1930년 화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강성렬이 기생들 연극의 “무대감독을 맡았다”는 것은 이미 연극에 대해 적잖은 지식이나 경륜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이것은 그가 <취성좌>에서의 경험을 뜻하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전후(前後) 정황으로 보아 이 ‘공연’ 이 시기는 1920년대 중반 무렵 이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참고로, 인천권번 기생들이 연극 공연을 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1912년 대한매일신문 기사에도 보인다. 이때는 권번 기생들을 공연예술자로 인식하던 때여서 그들이 연극 같은 공연을 종종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특히 이들은 자체 운영자금 마련이나 풍수 피해를 입은 재해(災害) 시민 위문 자선 공연을 가졌었다. 아마 인천권번 기생들도 그런저런 이유로 연극 무대에 섰던 모양인데, 그때 공연 내용이나 동기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시 뒤로 돌아가, <취성좌>에서 강성렬은 그다지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지는 못한 듯하다. 아쉽게도 당시 내로라하는 조선의 배우 연출가 등 수많은 무대 예술인들의 활약상을 모아 기록한 중에도 그의 이름만은 찾을 길이 없다. 혹 다른 극단에서의 활동이 있었는지를 확인해도 여전히 허탕일 뿐, 끝내 배우 강성렬의 이름자는 단 한 줄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취성좌>에서의 활동 기간 역시도 불명하다. 설혹 그가 이 단체 창설 멤버였다 해도, 아무리 길어 보았자 불과 몇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24년에 이미 <문화극단(文化劇團)>이라는 연극 단체의 단장 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극단을 주도적으로 창설했는지 여부도 역시 알 길이 없다. 이 극단의 출현에 대해서는 1923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각처에 흣터저서 잇든 신파연극계의 중요한 배우들로 새로히 조직된 문화극단은 재작 이십구일부터 시내 인사동에서 신파 연쇄극을 상연하얏다는대 닷새 동안 흥행을 한 후 디방으로 순업을 하리라더라.”
그 밖에, 1923년 12월 1일자 발행 잡지 『개벽』에 극작가 김운정(金雲汀)이 쓴 글 「劇界一年의 槪評」에서도 다소 비우호적이고 냉소적이지만 <문화극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今年에 일어난 劇界의 運동(人변에 動)은, 오히려, 작년 모다도, 더욱 미약하얏다. 작년까지는, 관중이나, 또는 興行業者간에, 아직, 新派劇이라는, 새 명칭이, 얼마쯤 호기심을, 자어내는 경향도, 그대로, 남어잇섯고, 또 전문으로 연극에 종사하든, 단체들도, 그 기분의, 남어잇는 것을, 이용하야, 적지 아니한 효과를 어덧섯다. 그 뿐만 아니라, 專門知識을 가진, 지도자들이, 얼마쯤, 성의잇게, 각본도 선택하고, 직접으로 무대를 감독하는 등, 여러 가지의, 참된 운동의 敍幕이 열리엇스나, 今年에는, 이러한, 운동이, 도로혀, 中道에 挫折되야버리고, 말엇다, 작년까지, 생명을 겨우 유지하야 오던, 藝術座와, 尹白南君의, 民衆劇團도, 今春 以后로는, 그 形跡까지, 渺然하게 되고, 다만 수삼 단체의 慘酷히, 鮮散된 그 殘員들이, 文化劇團이니, 黎明劇團이니 하는, 미약한 단체를, 조직하야 가지고, 團成社나 朝鮮劇場에서, 例와 가튼, 無價値한 흥행을, 몃 차려 하얏스나, 그남아, 收支가 相償되지 못하야, 곤란한 狀態에 잇는 모양이다.”
강성렬이 <문화극단>의 대표임을 보이는 기사는 1924년 10월 31일자 시대일보에 실려 있다. 그 기사는 “문화극단 단장 강성렬 씨의 주선으로” 1924년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인천의 표관(瓢館)에서 “『뉴니뻐-샬』 가주특작(加州特作) 「라주음의 비밀」전 삼십륙 권 영화를 두 번에 난후어 인천에서 공개할 터인데 본보(本報) 독자에게는 특히 반액으로 우대할 터이라는 바”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극단>은 앞의 동아일보 기사대로 지방 순회공연을 계획했지만 주목받을 만큼 활발하지는 못했었던 듯하다. 보이는 것은 1925년 1월 수원에서의 공연 기록뿐이다. 그리고는 1925년 인천에서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배경으로 연쇄극(連鎖劇) 「연(戀의 역(力)」을 촬영한다는 기사이다.
이후 <문화극단>의 존속에 대해서나 강성렬 개인에 관련해서 더 이상 알려진 내용도 기록도 없다. 명색이 극단 단장이었는데도 흥행 실적이나 활약이 거의 없는 것처럼 아무런 기록이 없었던 것은 당시 그가 한국 연극계의 인텔리도 아니요, 연기의 비중이 컸던 대배우도 아닌 데다가, 재력 또한 든든하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바로 앞의 김운정이 쓴 ‘몇몇 해산된 연극 단체의 남은 단원들이 문화극단(文化劇團)이니 여명극단(黎明劇團)이니 하는 미약한 단체를 조직해서 무가치(無價値)한 흥행을 몇 차례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수지를 맞추지 못해 재정의 핍박을 받는다’는 글의 행간 속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인천권번의 유명한 기생 일점홍과 눈이 맞아 행방을 감추기까지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강성렬. 아무튼 그는 ‘임성구의 연극에 심취한 인천 소년’에서 훗날 <문화극단>의 단장을 한 인물이다. 그리고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이 나라 무대 예술계에 나름대로 종사했고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국 무대사(舞臺史) 한 귀퉁이는 물론이거니와 인천 연극사에조차도 이름 한 자가 올라 있지 못한 것이다. 이 가을 그런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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