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최초의 미술동호인회를 창립한 김찬희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10-31 13:39:25
인천 최초의 미술동호인회를 창립한 김찬희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 1956. 10. 1 최계락의 시 동아일보
서양화가 김찬희(金燦熙) 역시도 시사(市史)와 지인의 회고록 속에 유령처럼 어둑하게 한 줄 이름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가 어떤 화풍의, 어떤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도 없고, 그런 내용을 기대하는 것이 차라리 어리석은 일이다. 인천에서 작품 구경을 한 사람은 있는지…. 몇 작품이나마 인천 어디에 남아 있을 법한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다. 과문한 탓이라고 돌리자. 그렇다면 시 박물관에? 시 도서관에? 시청 어디에? 미술관이라도 하나 가진 도시였더라면 최소한 여기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은 한두 편이라도 수장했을 터인데….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 최초의 순수 미술인 단체로 ‘인천미술인동인회’라는 그룹이 탄생되었다. ‘세루팡’이라는 다방에서 모임을 가진 창립 동인은 이건영(李建英), 최석재(崔錫在), 김순배(金舜培), 김찬희 등이며 임직순(任直淳), 김기택(金基澤) 등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는 별도로 ‘인천미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 회원은 서양화에 박응창(朴應昌), 김학수(金學洙), 우문국(禹文國), 김찬희, 이명구(李明久), 윤기영(尹岐泳), 한봉덕(韓奉德), 서예에 류희강(柳熙綱), 박세림(朴世霖), 장인식(張仁植), 미술평론에 이경성(李慶成) 등이다. 해방 후 인천화단을 형성하는 모체로서 이들 단체가 출범하기는 했으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와해되는 실정이었다.”
“여하튼 인천 미협은 인천문총의 다른 산하 단체와 같이 행동을 같이하여 이해 유월에 지방자치법 실시 축하 미술전을 가졌고 시월에 제2회 문총예술제의 일련 행사로 제1회 인천미협전을 금융조합 이층에 전시했다.
이때 출품작가 중 특기할 만한 사람은 양화에 윤기영, 유희강 씨, 서예에 심상원 이영돈, 장인식 씨 등인데 초대지부장 이였던 김찬희 씨의 명단이 안 보이는 것은 이보다 한 달 앞서 결성된, 문총에서 분열되어 이인석 씨를 중심으로 한 자유예술인연합인천지부에 가담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앞의 글은 『인천시사』의 기록이고 뒤의 글은 고 우문국 화백의 회고록이다. 시사는 김찬희가 광복 후 인천 최초의 미술단체를 결성한 주인공으로 적고 있는데, 특히 그는 “해방 후 인천화단을 형성하는 모체”였던 ‘인천미술인동인회’와 ‘인천미술인회’ 두 단체의 창립 멤버임을 보이고 있다. 물론 우문국 화백의 회고처럼 다소의 마찰과 잡음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김찬희는 인천 현대 화단의 초석을 놓은 주요한 작가였던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을 조금 더 살펴보자.
“1950년 6월에 문총 인천지부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발족 10여 일만에 6·25가 터져 활동이 중단되었다. 전시중 이 단체는 <인천문총 구국대>라는 명칭으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중략> 인천화단을 지키며 그 험난한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로는 김찬희, 김학수, 윤기영, 김진명(金鎭明), 이병태(李炳泰), 우문국, 이명구 등이 있다.”
▲ 1956.12. 6 김찬희 동아
“1·4 후퇴 후 인천 미국공보원은 본원의 지시에 따라 경주에 분원을 개설했다가 1951년 5월 본원 방침에 의해 폐쇄하고 말았다. 나는 그 해 8월경 혼자서 서울을 거쳐 인천에 들렀다. 우선 궁금한 것이 문총동지들의 동태였다. 그들 중 먼저 돌아온 장인식, 최성연, 임진수, 고봉인, 김찬희 씨 등이 반파된 미국공보원 건물을 임시 문총회관으로 정하고 구국대 사업을 이어 나가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역시 시사의 기록과 우문국의 회고기인데 똑같이 전쟁 중 문총 활동을 펴는 김찬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무렵 인천의 문인들은 지역적인 사정상 그리고 열악한 출판사 사정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작품집을 낸다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때문에 문총구국대가 기념행사 때마다 주로 행하는 시화전(詩畵展)과 문학강연회를 통해 작품 발표의 기회를 갖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시화전이 있을 때마다 출품하는 시인은 이인석, 한상억, 조병화, 최성연, 표양문, 고봉인, 임진수(林眞樹), 김양수, 김차영 등이었고, 글씨로는 유희강, 박세림, 장인식 등이, 그림은 김찬희, 윤기영,·김학수 등이 담당했다.”
이 기사 역시 『인천시사』의 기록이다. 전쟁 중의 김찬회를 비롯한 인천 문인, 화가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여기서 탄생한 ‘시화전’이라는 예술 형태다. 물론 이에 대한 확실한 고증은 없으나 ‘시화전’이라는 종래에 볼 수 없었던 예술 형태를 인천의 문인, 화가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 1956.12. 31. 김찬희, 동아
아무튼 김찬희에 관련한 인천의 기록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그에 대한 신상 정보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출신도 학력도 모른다. 언제까지 여기서 살았는지, 이주를 했는지, 화가로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생을 마쳤다면 언제였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혹 그와 연관을 맺었던 인물들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활동 기록으로 남은 유일한 것이 동아일보의 1956년 12월 서울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개최한 유화 개인전 기사이다. 전시 작품의 목록 가운데 인천을 암시하는 「겨울의 포구」 「저녁의 축항」 등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더불어 그는 최계락의 시와 인천 시인 고 최승렬(崔承烈)의 시 「엄마가 오시는 저녁 때」에 삽화를 그렸다. 모두 그 해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다.
그의 행적은 분명 어디엔가 더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그의 그림을 찾아 걸고, 그의 일생을 찾아 밝혀야 한다. 인천 미술사에 정당히 그의 이름을 올려야 한다. 그는 우리 인천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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