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동호인회를 조직했던 서병훈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11-17 00:44:09
국악동호인회를 조직했던 서병훈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서병훈은 인천 개항 초기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를 이끌며 민족 상인 보호에 큰 공헌을 한 서상빈 (徐相彬)의 아들로, 선친이 민족 경제 육성에 힘썼던 것을 본받아 1920년대에 하상훈(河相勳) 등과 인천물산객주조합의 이사(理事)로 활약했다. 또한 하상훈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 제2대 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더구나 인천의 경제권을 독점하여 좌지우지하는 일본인 기업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인천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 언론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에 전념했다.”
이것이 『인천시사』에 보이는 서병훈(徐丙薰, 1888∼1949)에 대한 인물기(人物記)이다. 그의 부친 서상빈은 개항 직후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인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를 설립해 취약한 우리 민족 상권 보호를 위해 애썼고, 제녕학교(濟寧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도 전념한 선구적인 인천 인물이다. 글 중에 비친 대로 서병훈의 행적은 바로 그 아버지의 정신을 닮아 있는 것이다.
“인천의 음악 운동을 살펴보면, 초기 고전 국악 연구 단체로 동아일보 인천지부 건물에 있던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 격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것은 고상한 음악 동지가 필요한 데서 나온 성싶다. 구락부 명칭은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에서 따온 것 같다. 주요한 부원으로는 최선경, 송균, 서병훈 씨와 동아일보 사원들이었다. 이들 7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 단체의 창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처음에 인천부 내리에 임시 본부가 있다가 후에는 용강정에 회관이 있었다. 이 단체 역시 전체적인 임원 명단은 알 수 없으나 1923년 4월 27일 제7회 정기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은 부장 하상훈, 총무 서병훈, 학습과장 고주연, 도서과장 박충의, 운동과장 라시극, 식산과장 전두영, 평의원 윤 육 외 9인 등이다.
1924년 직제를 간부제로 변경하여 임원을 개선한 뒤에도 역시 하상훈이 간사장이 되고 서무 서병훈, 학습 최선경, 도서 이범진이었다.”
앞의 글은 고일(高逸) 선생이 쓴 『인천석금』의 내용이고 뒤의 것은 『인천시사』의 기록이다. 서병훈이 하상훈(河相勳), 최선경(崔銑卿), 이범진(李汎鎭) 등과 국악동호인회인 이우구락부를 조직한 것으로 돼 있다.
이우구락부의 정확한 창단 시기나 존속 기간에 대해서는 자세하지가 않다.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1920년 4월부터 1927년 4월까지가 7년간이다. 시사의 기록 중에 “1923년 4월 27일 제7회 정기총회”는 “1924년 4월 14일”로 동아일보는 적고 있다. 이것을 기술하던 기자(記者)의 착오인 듯싶다. 활동 등에 대해서도 더 이상의 분명한 자료가 없다.
다만 우리 고유문화의 부흥을 내세운 것이 창단 목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도 초기의 “7인” 모임에서나 그랬고 후일에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경영하고 사회 운동을 벌이는 등 이른바 친목적인 소규모 ‘국악 모임’과는 크게 다른 양태를 보인다. 물론 국악내지 음악 활동이라면 물론 이우구락부 초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 8월의 한용단 곽상훈 단장과 이우구락부의 후원으로 열린 음악회가 있기는 하다.
“京城 朝鮮古音樂選手 諸氏와 中國樂師 男女及 朝鮮人으로 西洋樂에 宿工이 富한 諸氏로 編成된 東西音樂大會를 仁川府 歌舞技座에서 去十九日 下午 八時에 開演한바 當夜 觀覽人이 無慮 千餘 명에 달하야 大盛況을 呈하얐는대….” [“경성 조선고음악선수 제씨와 중국악사 남녀급 조선인으로 서양악에 숙공이 부한 제씨로 편성된 동서음악대회를 인천부 가무기좌에서 거십구일 하오 팔시에 개연한바 당야 관람인이 무려 천여 명에 달하야 대성황을 정하얐는데….” ]
이것이 동아일보에 실린 유일한 음악회 기사다. 고일 선생의 회고담처럼 결코 소규모 친목회 형식의 모임 수준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단체가 나름대로의 어떤 ‘심화된 문화 예술적 활동 측면’을 가졌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서 “애호와 계몽의 역할을 했을 뿐 뛰어난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개항 이후 새로운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신문물이 도입되는 와중에 우리 국악을 애호하고 보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했다는 것은 대단히 선구적이고 동시에 우리 인천 문화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병훈은 예술인이라기보다는 언론인, 사회활동가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우구락부 외에 그가 펼친 사회 활동들을 살펴보자. 먼저 그는 신정회(新正會) 창립 멤버가 된다. 신정회는 1927년 6월 6일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인천의 유지들이 창립한 단체다. 위원장은 하상훈, 상무위원은 곽상훈(郭尙勳), 고일 등이며 서병훈은 평위원으로 참여한다. 이어 12월 5일에는 신간회(新幹會) 인천지회가 설립되는데 서병훈은 여기에도 간사로 참여한다. 그는 또 1945년 10월에 결성된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에도 곽상훈, 하상훈, 이범진, 전두영(全斗榮) 등과 함께 가입,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한다.
서병훈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몸을 담은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선 1920년 5월로 확인된다. 이 무렵 동아일보 사고에는 하상훈이 초대 지국장이고 서병훈이 총무로 나와 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 하상훈의 뒤를 이어 2대 지국장이 됐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1927년 9월에 인천지국장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후임은 기자였던 김헌식(金憲植)이 맡는다. 그러니까 동아일보 인천지국은 하상훈, 서병훈, 김헌식, 이범진 등 같은 멤버들이 차례로 맡은 것이다.
“한용단(漢勇團)이 해체된 후 1926년 이들 선수들이 재결합해 고려야구단이 재결성되었다. <중략> 한용단의 재정 후원은 장인수와 동아일보 인천지국장 서병훈이 매니저로 뒷바라지를 했다는 후문이다.”
아직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있을 때의 일을 기록한 『인천시사』의 내용인데 서병훈의 항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한용단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을 뒤에서 돕고 있었던 것이다. 1929년 서병훈은 인천의 유지들과 함께 경북지방에 든 기근(饑饉)을 구제하기 위해 ‘饑饉救濟會組織’(기근구제회조직)이란 단체를 창립하기도 한다. 이 조직은 일제가 당시 신간회 같은 이념 단체가 나서서 모금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만든 단체였다. 그밖에도 1921년 4월 인천엡웟청년회 주최 토요강연회에서 「본능의 동물」이란 연제로 강연을 가졌다는 기사도 보이는데 서병훈 역시도 당시 많은 인테리 계층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계몽운동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병훈은 문화 예술인이 아니라 언론인, 사회운동가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여기에서 서병훈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개항 이후 신문화 유입 초기의 인천의 국악 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민족지 동아일보를 지주로 해서 우리 국악 애호사상을 펼치려 했던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사족 같은 이야기를 해 둔다. 서병훈의 영식 서정익(徐廷翼, 1910∼1973)에 관한 이야기다. 『인천시사』에는 서상빈, 서병훈, 서정익 3대의 인물기가 실려 있다. 아마 3대가 나란히 시사에 올라 있는 가문도 거의 없을 것이다. 서정익의 기록을 간추려 본다.
‘서정익은 1932년 일본 나고야고등공업학교 방직과(紡織科)를 졸업하고, 1933년 인천의 동양방직(東洋紡織)에 창설 사원으로 입사한다. 한때 중국의 동양방직에 근무하기도 했으나 광복과 더불어 인천으로 돌아와 동양방직공장의 차장으로 복직하여 공장장과 이사를 거쳐 1949년 이사장으로 선임된다. 1955년에 민영화된 동일방직(東一紡織)의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사세를 계속 확장시켜 1960년에는 중앙염색가공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63년에는 대한화섬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69년 철탑산업훈장을 받는다. 1962년 대한방직협회 이사장에 취임하고, 1963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로 취임한다. 1970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상무이사로 선임되어 한국 경제의 중추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인천의 명문 서씨(徐氏) 가의 서상빈, 서병훈, 서정익 3대가 민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그리고 인천을 위해 헌신한 사실을 잊을 수 없다.
<※글 중 ‘동아일보에 실린 유일한 음악회 기사'는 한자와 한글이 혼용돼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다시 한글로 별기했기에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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