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우구락부 멤버 이범진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12-03 11:00:06
또 다른 이우구락부 멤버 이범진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이번 호에도 전호의 서병훈(徐丙薰)과 같은 이우구락부 멤버 이범진(李汎鎭)을 소개한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같은 국악동호인회 이우구락부 회원이라는 점 외에도, 당시 인천에서 펼쳤던 활동들이 아주 닮아 있는 특징이 있다.
▲ 1920.6.26. 이범진
우선 가장 눈에 띄는 한 가지 사실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이라는 직책을 돌아가면서 맡은 것인데 서병훈이 2대, 이범진이 3대인 것이다.
또 그들은 같은 신간회 회원이었고, 똑같이 한국민주당인천지부 당원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가까운 동지(同志)였다고 해도 흡사 쌍둥이처럼 똑 같은 코스를 밟아 활동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거기에 두 사람 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범진이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기록은 192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사고(社告)에서 보인다. 내용은 ‘초대 인천지국장 하상훈(河相勳), 총무 서병훈, 기자 이범진’으로 돼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범진이 서병훈과 마찬가지로 사회 계몽 강연에도 자주 나선 점이다. 이 활동도 똑같아서 이 해 6월 26일 내리 여자엡윗청년회 강연회에 연사로 초청돼 ‘여자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특별 강연을 하고, 1921년에는 내리엡윗청년회에서 ‘인생 문제와 기독교’, 그리고 1922년 3월에는 ‘유효(有效) 생활’이라는 강연 활동을 하는 것이다.
서병훈과 똑 같은 행보의 하나는 ‘기근구제회(饑饉救濟會)’ 참가도 빼놓을 수 없는데, 1929년 경북지방에 든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서병훈 등 인천 유지들과 함께 결성한 단체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이 조직은 당시 신간회 같은 이념단체가 나서서 모금하는 것을 일제가 막았기 때문에 이들 인사들이 다소 편법으로 만든 단체라고 할 수 있다.
30년대 동아일보 제3대 인천지국장을 지냈고, 해방 후 한민당 인천지구당 위원장으로서 불철주야 하고 당무에 전념하다가 건국을 눈 앞에 둔 1947년에 과로로 쓰러진 춘보 이범진을 기리면서 그 가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 920.5.26 동아일보 사고
“춘보의 부친 평창 이씨 기웅(基熊)은 무반으로 근위대에 있다가 시운을 체념하고 19세기 말에 인천으로 낙향해 정착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모친 송 씨를 따라 그도 내리예배당에 다니면서 영화학교 보통과와 특별과를 졸업했다.
그는 3형제 중 둘째였으나 인천외국어학교 1회생으로 졸업한 백씨 성진(成鎭)은 보증 관계로 번성하던 사업을 망쳤고, 계씨는 요절해 홀로 집안을 떠맡게 됐다. 때마침 아펜젤러 목사를 중심으로 친교를 맺고 있던 오천석(吳天錫, 전 문교부장관), 유억겸(兪億兼, 전 연희전문학교 교장), 김영섭(金英燮, 감리교 목사) 등 같은 또래가 미국 유학을 떠나는데 이러한 딱한 사정으로 동행을 단념하고 영화학교 교원으로 남게 됐다.
춘보는 언변과 화술에 능한 문장가였고, 악기와 정구의 명수이기도 했다. 용모는 수려했고 두뇌가 명석해 발간과 동시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엡윗청년회와 이우구락부, 그리고 신간회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곽상훈이 젊은 시절에 몇해 동안 춘보 댁 사랑채에서 기거했던 일은 미담으로 알려져 있다.
그간 같은 내리예배당에 다니던 서병훈, 하상훈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남긴 일화도 적지 않고, 그의 유명한 설교는 『백목강연집(百牧講演集, 1920년 간행)』에도 수록돼 있다.
인천서 최초로 올린 서병훈, 안인애(安仁愛, 전 대한부인회 인천지부장)의 신식 결혼식을 집례한 후 결혼식 주례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정치 역량이 탁월해 초대 인천시장 임홍재(任鴻宰)와 입법의원 하상훈, 양재박(梁在博)의 탄생을 주도했다. 자신을 위한 다음 기회를 차분하게 설계하다가 애석하게도 고인이 됐지만, 인천에서 가장 자질이 뛰어난 일급 지도자였으니 만큼 그가 좀 더 생존했더라면 인천의 정치 판도가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돼 그이 모습이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 차남은 요절하고 4남인 경기은행 업무개선실장 이원철(李源喆) 등 3형제가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가문의 융성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
이 글은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쓴 『인천 한 세기』의 내용인데 생전에 실제로 보고 겪은 이범진의 진면목과 그의 내력을 아주 여실하게 그리고 있다. 글 중에 언급된 『백목강연』 1권에는 아펜젤러, 로라 복, 게일 등 선교사들과 최병헌, 이명혁, 이명직 등 목사들의 설교, 홍병선, 이범진, 이병주 등 전도사들의 설교와 김활란, 윤치호 그리고 이화학당의 교사였던 신준려 여사의 설교 등 총 25편이 수록돼 있다.
▲ 1922.3.26. 이범진]
재미있는 것은 동고동락하듯 하던 서병훈의 결혼식을 집례했다는 대목과 하상훈 등과의 술좌석 이야기다. 더불어 그의 가세가 오천석, 유억겸만 했어도, 그래서 미국 유학을 할 수만 있었어도, 훗날 인천에서의 그의 역할이,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없는 의문도 가져 본다.
아무튼 신 박사가 그의 타계를 지극히 아쉬워할 만큼 이범진의 인품이나 역량, 그리고 인천 지역사회에서 차지했던 비중과 영향이 컸었음을 이 글로써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자료를 찾으며 느낀 것은 그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늦은 두 번째,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늘 ‘다음’을 기다리는 그의 ‘인품’은 이런 데서 묻어난다.
다만 여기서, 신 박사의 글에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약간 보충할 것이 있다면 1945년 10월 31일 임홍재가 인천시장이 된 후, 이범진은 같은 이우구락부원인 하상훈, 전두영(全斗榮) 등과 함께 인천시회 의원(仁川市會 議員)으로 선출된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정치적 역량 발휘의 시작이었을 터인데 불과 2년 후
▲ 1921.5.11. 이범진
아쉽게 타계하는 것이다. 이 같은 활동상을 놓고 볼 때, 이범진 역시 서병훈과 마찬가지로 문화예술인이라는 호칭보다 인천지역의 사회운동가, 혹은 애국자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인천인 이범진! 이범진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는 우리의 선세(先世)라고 할 수 있는 신태범 박사의, 인용한 이 저술 외에 더 이상의 연구, 진척이 없다. 이것은 언필칭(言必稱) 인천학을 운위면서도 이 같은 주요 인물 연구에 대해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우리의 태만이며 불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호에서도 지적한 바, 이범진 등이 “개항 이후 새로운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신문물이 도입되는 와중에도 우리 국악을 애호하고 보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했다는 것은 대단히 선구적이고 동시에 우리 인천 문화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해 본다. 그리고 이범진은 “인천의 국악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면서 민족지 동아일보를 지주로 해서 우리 국악 애호사상을 펼치려 했던 애국자”라는 말도 덧붙인다.
인천 국악의 뿌리는 이범진을 위시한 이우구락부 회원들의 이 같은 애호정신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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